1. 성경의 원어가 말하는 “영혼”의 의미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피쉬)이 된지라”(창 2:7)

 

성경은 완성된 인간 창조물을 가리켜 “생령”(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구약성경에서는 히브리어로 “네페쉬”(nephesh)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로 “프쉬케”(psuche)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이 두 원어는 모두 “숨 쉬며 살아있는 존재” 또는 “생명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네페쉬=프쉬케=살아있는 영혼=생명체=사람).

그래서 새번역성경에서는 혼이나 영이라는 표현 대신 “생명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원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나타냈습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 2:7, 개정)

 

“호흡”이라는 뜻을 가진 “루아흐”와 “프뉴마”를 잘못 번역함으로써 생긴 오해가, “생명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잘못 번역함으로써 똑같이 반복된 것입니다. 죽음과 영혼에 대한 성경 말씀을 번역하면서 왜 이런 문제가 계속해서 반복되었을까요? 왜냐하면 “영혼”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에 맞추어서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1. “영혼”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

“생명”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종종 “영혼”으로 번역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의미를 크게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잘못 번역된 말씀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영혼”을 불멸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혼이나 연기 같은 존재로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라는 말을 읽거나 들을 때마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단 한 번도 영혼을 불멸이나 죽지 않는 연기 같은 존재로 언급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의 원어인 “네페쉬”는, 구약에 기록된 총 754회 중에서 22번은 “새, 물고기, 짐승” 등을 가리켰으며 7번은 사람과 짐승을 동시에 가리켰고 절반 이상은 “영혼”(soul)으로 오역되었습니다. “네페쉬”의 참뜻인 “생명”(life)으로는 119번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한 “네페쉬”와 동의어인 신약성경의 “프쉬케”는 총 105번 사용되었는데, 번역하는 사람의 판단에 따라서 “생명”으로 40번, “마음”으로 3번 번역되었고, “영혼”이란 말로 58번이나 오역되었습니다.

이러한 번역상의 심각한 문제 때문에, 사람이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서 불멸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절들을 가리키면서, 영혼불멸설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프쉬케)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프쉬케)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영혼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성경절을 지적하면서, “몸은 죽어도 영혼은 몸으로부터 빠져나가기 때문에 결코 죽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는 이어지는 성경절을 읽을 때 쉽게 풀리게 됩니다.

 

“자기 목숨(프쉬케)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프쉬케)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절)

 

28절에서는 “영혼”으로 잘못 번역되었던 “프쉬케”가 39절에서는 “목숨”, 즉 “생명”(life)으로 올바르게 번역되었습니다. 왜 계속해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죽음과 영혼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견해에 맞추어서 번역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9,10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프쉬케)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이 장면은 일곱인 예언의 다섯째 인에 나오는 장면인데, 중세기에 죽임을 당했던 순교자들의 영혼이 부르짖는 모습입니다. 중세기 천주교회는 종교재판소라는 것을 만들어서 수많은 성도들을 죽음으로 몰고갔습니다. 진리를 따른다는 이유 때문에 5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런 핍박의 시대가 끝나면서 중세기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장면을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실제로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하늘에 올라가 외치는 장면으로 해석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연기처럼 그 혼이 빠져나가서 천국에 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서 불멸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여기에 나온 영혼들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인데, 그들의 영혼은 하늘에서 자신들의 원통함을 부르짖고 있다”고 말합니다.

만일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면, 중세기에 죽은 순교자가 5천만 이상이나 되는데 그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조그만 제단 아래 모여서 탄원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순교자들이 하늘에서 연기처럼 존재하는 영혼들이라면, 어떻게 영혼들이 흰 두루마기를 입을 수 있을까요?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계 6:10,11).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이 실제 장면인지 상징적인 표현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섯째 인에 나오는 영혼들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들일까요? 아니면 중세기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9절에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라고 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제단은 어떤 제단일까요? 성소에는 두 가지 제단이 있습니다.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이 있고, 성소 안에는 분향단이 있습니다. 희생제물로 드려진 양이 죽임을 당하고 그 피를 쏟는 곳은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입니다. 그러므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라는 말씀은 중세기 성도들의 순교를 번제단 아래에서 죽임을 당하고 희생의 피를 흘린 것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실제로 번제단 아래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순교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은유와 상징적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을 책망할 때도 하나님께서 은유와 상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아벨)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였느니라”(창 4:10). 이 말씀도 실제로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벨의 억울한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상징과 은유로 해석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죽은 순교자들이 탄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고”(전 9:5)

“사망 중에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시 6:5)

“그 호흡이 끊어지면(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죽는 그날에) 그 도모(계획, plan)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성경은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기억도 못하고, 계획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호소한다는 말씀은 상징적인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감리교회의 주석가인 아담 클락 박사도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상징적인 계시 가운데 제단을 보았다.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순교를 당한 성도들로서 우상숭배와 미신적인 거짓 가르침들 때문에 희생당한 자들을 표상한다. 왜냐하면 이 제단은 이 땅에 있는 제단을 말하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제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편집인 주, 아담 클락 박사도 성도들의 순교를 이 땅의 제단에서 희생당하는 것으로 해석했음).”(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들, p.433)

 

같은 장 11절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서 흰 두루마기, 흰옷, 흰 세마포는 모두 순결과 승리와 구원을 상징하는 의의 옷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순교당한 성도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잠시 동안 쉬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은 승리와 구원을 나타내는 흰 두루마기를 받았는데 왜 잠시 동안 쉬어야 할까요?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죽은 성도를 부활시키고 영생의 보상을 주실 때까지 잠시 무덤에서 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부활신앙입니다.

죽은 의인들은 구원의 증거인 “흰 두루마기”를 받고 무덤 속에서 쉬면서 예수께서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나팔 같은 소리로 죽은 의인들을 부르시면, 그때 무덤이 열리면서 부활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 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 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하늘로좇아강림하시리니그리스도안에서죽은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부활)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속으로끌어올려공중에서주를영접하게하시리니그 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5-17)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죽은사람의상태에대해서이야기하면꼭나오는것이누가복음16장의부자와거지나 사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비유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일어난 장면일까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실제로 해석하면, 지옥에 있는 부자와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이 서로 대 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천국에 간 나사로가 손끝으로 물을 찍어서 지옥에 있는 부자의 혀 에 물방울을 떨어뜨려 시원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천국에 간 의인과 지옥 불구덩이에서

지글지글 타는 악인이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하며 물을 찍어서 혀에 묻혀주면서 살아야 한다면, 그런 장소가 천국이 될 수 있 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자녀와 남편이나 아내를 보면서 영원토록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정말 천국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고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실화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성품과 기독교 신앙 자체가 이상하게 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월 간지 <변화> 22호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진리횃불 웹사이트에서 읽거나 월간지를 신청해서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