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숲에 머물고 있을 하나님께서 그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17) 말씀하시고, 가지를 일러주셨습니다.

첫째는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18)이라는 것이고, 둘째는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20, 21)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방문해서 그들의 죄악을 확인해 보시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공의롭게 처리하신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 결과가 멸망일 것을 즉각 알아차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 거주하는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곳을 멸하시고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24)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18:25).

 

구원에도 공의가 필요한가?

우리는 성경절에서, 아브라함이 롯의 가정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사랑 아니라공의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한 위의 성경절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 소돔성에 죄악이 가득차서 이제 멸망시키려고 하는데, 안에 의인이 명이라도 있다면, 의인들이 악인과 함께 멸망당하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한 분이라고 생각할 텐데요. 심판은 공의로워야 하지 않습니까?” 말은, 악인을 멸망시키는 것도공의이고 의인을 구원하는 것도공의라고 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죄악이 극도에 달하여 이상 지구상에 남겨 없는 상태가 되었을 하나님께서 성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키기 위하여 땅에 잠시 방문하셨습니다. 바로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망할 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세상에 친히 내려오셔서 아브라함과 문제를 의논하였을까요? 만약에 창세기 18장에 기록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가 없었더라면,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가 갑자기 불로 멸망당한 사건에 대하여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품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자기들도 갑자기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나눈 대화 내용을 살펴보면 안에 하나님의공의 나타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공의때문에 사람이 구원을 받기도 하고 같은공의때문에 심판과 멸망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공의 없는 사랑이 가능한가?

현대 신학은 사랑과 자비가 대세입니다. 인기 있는 강사들은 하나님의무조건적인 사랑”, “절대적인 사랑 외칩니다. 그러한 곳에는 사람이 모여들고, “아멘 합창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작가인 필립 얀시(Philip Yancey) 그의 저서 <놀라은 은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값없이, 아무 조건 없이 온다내가 아무리 잘난 짓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커지지 않는다내가 아무리 못난 짓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작아지지 않는다하나님은 그냥 나를 사랑하신다.”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열광합니다. 물론 이러한 표현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은 분명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참된 사랑이 되게 하는 기초, 하나님의 공의를 생략하거나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가 없다면 용서가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공의가 없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형벌이 없는데 어떻게 은혜가 존재할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모든 강의의 초점을 하나님의무조건적인 사랑”, “절대적인 사랑에만 맞춥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죄인들을 심판하거나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엄숙하고 요긴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증거하는 대신,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분명히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유약한 감상주의로 전락시켜 선과 악을 거의 구별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대 신학의 사조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견책,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 등이 모두 무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십계명의 모든 내용이 마치 죽은 문자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을 인용은 하지만 귀를 즐겁게 하고 매혹시키는 우화적 이야기들을 섞어서 영적인 감각을 흐리게 뿐만 아니라 종래에는 신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을 부인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으면 되고, 재미있으면 되고, 은혜 받으면 되고, 감동적이면 됩니다. 오늘도 교회 강단에서 많은 말씀들이 선포되고 있지만, 어떤 말씀들은 온전한 복음이 아니라 반쪽짜리 복음, 혹은 가짜 복음인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독자 여러분 중에공의라는 말이 포함된 이번 호의 제목을 보고 글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분이 있다면, 아마도 성경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도 진노하시나요?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할 조용히 타이르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예수께서 지상생활을 하실 그런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이나 주변 환경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살지 못하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대신에 이해해 주시고, 어루만져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한번은 성전을 방문하셨을 , 성전 마당이 장사꾼들과 협잡꾼들로 난장판이 것을 보시고는 채찍을 휘두르시고, 돈을 쏟고, 상을 엎으시며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2:16) 소리치셨습니다.

 

사랑은 항상 부드러운 것인가?

사랑이 항상 부드럽기만 것은 아닙니다. 자녀가 공을 주우러 달리는 자동차로 뛰어들 , 조용히 타이르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다급한 심정으로 고함을 지르고 야단을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런 상황에서 소리를 치게 합니다. 어린 아기가 물이 끓고 있는 냄비를 잡아당기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를 속이고 게임에 빠져 공부를 등한히 하는 아이에게 회초리를 들기도 합니다. 사랑도 때로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매를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장면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끝을 사르게 하시매”( 11:1)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25:3)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대상 13:10)

내가 분으로 위에 쏟으며 진노의 불로 멸하여 행위대로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2:31)

어떤 분은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 진노하시는 것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에도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경우를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18)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5:6)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3:5, 6)

성공회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스토트(Rev. John Robert Walmsley Stott)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악을형벌하거나심판하는 분으로 생각할 있을까?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있고, 또한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실로 십자가의 본질적인 배경은, 인간의 , 책임, 그리고 죄책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반응, 그의 거룩과 진노도 포함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성경적 종교의 기초이다. 따라서 죄가 하나님의 거룩과 양립할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그리스도의 십자가, 128, 129).

 

진노 –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필요했습니까? 물론 우리의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예언자로서 소명을 받을 스랍(seraphs)들이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룩하다구별하다 뜻입니다. , 하나님은 죄로부터 구별된 , 결코 죄를 용납할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진노이며, 이것이 십자가의 본질적인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경감시키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상에서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통해서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죄를 결코 지나쳐 버릴 없는 하나님의 속성,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시어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사랑과 자비도 나타나 있지만,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진노와 처벌도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당혹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처럼 진노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람의 분냄과 동일한 맥락에서 생각하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사람의 사랑 차원이 다르듯이하나님의 진노사람의 분노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토트는하나님의 분노는 절대적으로 순결하며, 인간의 분노를 악한 것이 되게 하는 그런 요소들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았. 그리고우리의 분노는 발작적인 폭발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불쾌한 감정과 보복하려는 시도에 의하여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의해서만 일어나고, 악에 대한 정죄 속에서만 표현되는, 하나님의 계속적이며 확고한 적대감(antagonism)이다. 하나님은 사적인 원한이나 앙갚음 같은 것을 전혀 가지지 않으신 분이시다. 실로 하나님은 적대자에 대해 감소되지 않은 사랑을 동시에 유지하신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는 병존(竝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노하심에 대한 성경의 공통적인 개념은, 인간의 하나님의거룩함 병존(竝存) 없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폭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대적합니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께 가까이 없으며, 또한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없으십니다.

사도 바울은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되리라”( 11:22)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선하심 보아야 하지만엄하심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시며, 역겨워하시고, 그것에 대해 진노하시며, 결코 죄와는 타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로 행악자를 용서하시고, 씻으시고, 받아들이실 때도 도덕적인 죄와 타협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할 있습니다.

스위스 신학자 에밀 브루너(Emil Brunner)하나님의 진노의 개념이 무시되는 곳에서는 복음의 중심 개념, 중보자를 통해 드러난 계시의 독특성에 관한 이해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없다면 중보자도 필요 없었을 것이고, 중보자가 필요 없다면 예수님의 성육신이나 중보사역도 불필요한 것이 되고 것입니다.

공의나 형벌이 없는무조건적인 사랑 언뜻 듣기에는 달콤하지만, 어차피 형벌이 없을 것이라면 십자가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게 감사하고 감격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려면,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준엄하심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가 필요합니다. 만약 어느 하나라도 축소시키면,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3:5) 반문합니다. 우리가 만일 죄를, 반항이 아닌 실수로 해석하고, 하나님을 분노하시는 분이 아닌 오직 관대한 분으로만 해석한다면 십자가는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보좌[존재]의 기초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할 때에, 어떤 사람들은하나님의 사랑 가장 중심적인 속성이며, 속성에 비추어 다른 모든 신적 완전성이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의와 공의(공평) 주의 보좌의 기초라”( 89:14; 97:2) 선언합니다. 여기에서 히브리어로체데크인데올바름’, ‘의로움이란 뜻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표준 말하기도 합니다. 시편 97 6절에서는하늘이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영광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체데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선포하실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영광을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시내산에 십계명을 선포할 때의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보좌[존재] 기초가 되는체데크 십계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상 성막의 지성소의 구조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성소 안에는 십계명을 보관하는 법궤가 있었고, 법궤 위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하는 광채(쉐키나) 머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빛으로 존재하고 계시는 법궤의 뚜껑을속죄소’( 16:2)라고 하였는데, 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죄인의 죄를 용서하는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의 개념으로 재해석하면은혜의 보좌’( 4:16)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는 장소라는 의미에서시은좌’(施恩座)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기초는 계명(공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되는 다른 측면, 공의미쉬파트인데 문자적으로 ‘(법적으로 선언된) 판결’, ‘언도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기준이나 법칙에 의하여 우주를 공정하고 공평하게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한원칙다스림 그분의 존재와도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공의는 하나님의 존재가 변경될 없는 것처럼 절대불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인을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측면만 보고 다른 쪽은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의 기초가 되는하나님의 공격합니다. 사도 요한은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정의하고 있습니다. ‘ 번역된 헬라어하마르티아하마르타노에서 유래되었는데과녁을 놓치다’, ‘잘못하다’, ‘잘못된 길로 가다’, ‘죄를 짓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나고 도덕법을 범하는 행위를 언급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법) 대하여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그렇게 진노하실까요? (불법)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죽게 만드는 원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하십니다. 만일 누군가가 당신의 자녀를 괴롭히고 심지어 죽이려 한다면 당신은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아마 당신이 정상적인 부모라면 사람에 대하여 진노하고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번이나 하나님을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 16:22; 27:16)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은생명의 원천이 주께 ”( 36:9)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비롯해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과 존재의 근원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요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행위가 그분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사람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죽음)시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 6:23)이므로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사람이 죽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가 발생할 죄를 처리하기 위해 돌격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죄와 공존할 없는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5:4-6)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19:2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돌파하고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19:24).

죄인이 죄를 가진 하나님께 접근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견디지 못하여 돌격하십니다. 그래서 죄인이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해결해야 하는데, 죄인 스스로는 죄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방법을 마련해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값을 대신 지불하셨기 때문에, 죄인이 예수를 믿을 죄가 해결되고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은혜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공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은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어서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89:14)라고 말합니다. 따라서공의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이며 그분의사랑 열매입니다. 공의와 인자함은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자비율법의 없이는 존재할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뜬금없이 갑자기 누군가에게내가 자비를 베풀어서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없는 허황된 말입니다. 그러나 명백한 잘못이 있는데, 조건 없이 그것을 용서해 준다면 그것이 자비요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자비나 은혜는, 우선 어떤 기준이나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범했는데 범법() 대가를 치루지 않은 상태에서 용서가 되어야 성립되는 것입니다. 원리에 따르면 공의와 사랑은 결코 분리될 없는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로도 비유할 있습니다.

 

[법-범법-은혜]는 연결된 고리와 같은 것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 4:15) 때문입니다. 범함이 없다면 죄도 없을 것이고, 죄가 없다면 형벌도 없을 것입니다. 은혜는 형벌을 면죄하여 주는 것이고, 형벌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한 다음,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2:4,5) 말씀을 삽입합니다. 허물로 죽지 않았다면 구원도 필요 없었을 것이고, 구원이 필요 없다면 은혜가 존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하나님의 공의를 분리시키려는 것은 사탄의 사상이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는 범죄 때부터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공의와 율법에 대해 적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계속되어 선악간의 대쟁투의 쟁점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사탄은하나님의 지킬 없는 것이고, 그것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하나님은 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부인하는 것은 사탄의 그러한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공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견책,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 등을 모두 무시하게 만듭니다. 열매는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일반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생활로 나타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라도 버리고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5:16~20)

말씀을 자세히 읽으면서 면밀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나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공의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본뜻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 85:10)었다는 말씀의 의미를 되새겨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자기 의로우심을 나타내야 합니까?

다음의 성경절은 십자가가 필요했는지 이유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3:25-26).

 

십자가 죽음이 왜 필요했는가?

성경절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목적을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가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입니다. 개념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자기도 의로우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십자가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가 있는 것도 아닐텐데 그분에게도 십자가가 필요했을까요?

십자가 이전에는 사람이 범죄하면 짐승을 죽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나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 10:4)했습니다. 만일 짐승을 죽여 죄사함이 가능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단지간과’(파레시스)하신 것입니다. 파레시스는사함 아니라넘어감또는지나감 의미합니다. 만일 짐승의 피로 죄사함이 이루어졌다면아페시스’(죄사함) 사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피를 상징했던 짐승의 희생과 피만 가지고는 죄를 사할 없기 때문에 죄를간과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죄를간과’(넘어감, 지나감) 했다면 하나님은 죄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신 공의롭지 못한 불의한 분이 됩니다.

그러므로 위의 성경절에서, 하나님께서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의로우신 하나님 입장에서는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자신의 의를 공개하신 것입니다. 때가 차매”( 4:4) 자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그분의 의가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의롭게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도 판단을 받으시는가?

자기도 의로우시며라는 표현은 선악 대쟁투의 쟁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주 앞에 판단을 받으실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럴 없느니라 사람은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3:4)

하나님이 누구에게 판단을 받으신다는 말입니까? 누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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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 know?

우주에 다른 피조물도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지구상의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악간의 대쟁투의 역사입니다. 싸움은 우주에 공개된 것이기 때문에 지구 외에 다른 세계에 거주하는 거민들도 인식하고 있으며 주시하고 있습니다. 지구 외에 다른 세계에 피조물이 살고 있다는 근거가 성경에 있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물론 있습니다. 가지 성경절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1:6; 2:1). 구절에서하나님의 아들들 누구인가요? 천사들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천사 누구에게 네가 아들이라”( 1:5,6)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앞에 모인하나님의 아들들 각기 자기들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격적 피조물들입니다. 우주의 다른 세계에서 아담처럼 처음 창조된 장자들이라고 해석됩니다. 당시 지구는 때문에 사탄의 손에 임시로 넘어가 있었기 때문에 지구의 대표자로 사탄이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에 나오는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 12:23) 것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준승을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38:4~7).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신 후에 함께 노래하며 기뻐했던하나님의 아들들 누구일까요? 그들이 바로 지구 보다 먼저 창조되었던 우주 다른 세계의 피조물들입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3:14,15).

말씀에서땅에 있는 족속 지구의 인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하늘에 있는 족속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하늘의 다른 세계에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 2:10)셨다는 말씀 속에서도하늘에 있는 자들 나옵니다.

이와 같이 지구 외에 다른 세계에 있는 피조물들이 모두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도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치하고 계시는 원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에 대하여 더욱 분명한 이해를 있게 됩니다. 반대로 사실을 모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공의로우셔야 하는지, 죄를 명확하게 처리하셔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깨닫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지구의 인류를 구원하시는 모든 과정에서 죄를 취급하시는 하나님에게 불공정한 사례가 드러나면 우주 통치의 기준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는 반드시 공정하게 합리적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공정하게 처리하는 면밀한 심판이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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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우주 안의 다른 피조물) 읽어보시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사역의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하실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육적인 세계에 속해 있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서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세계(사탄과 악한 천사들, 우주 다른 세계의 피조물들, 하나님의 천사들 )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과 이해가 있어야 구원과 심판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자기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 말씀이나 누구에게판단을 받으신다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없습니다. 바로 영적인 세계의 존재들에게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시며 공의로시우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죄를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표현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세계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고전 4:9)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에서세계코스모스 우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과정 속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모든 성도들은 우주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천사들과 피조물들에게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그들에게 충분히 이해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죄를 처리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절차는 모두 공개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질서에 조화되도록 공정하고 의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제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3:4) 말씀을 조금 이해하시겠습니까? 아직 이해가 되신다면, 계속 끝까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셨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서, 동안 때문에 불화했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화목한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희생제물혹은화목제물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어떤 위기에 봉착했을 때나 인간이 스스로 극복할 없는 위험이 예측되면 그러한 재난을 일으킨다고 생각되는 ()에게 제물을 바치는 습관이 있었고, 그러한 이야기나 기록들은 수없이 많이 나타납니다. 경우에는 사람이 신을 달래는 상황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불화하게 만들고 있는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이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희생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한 다음에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짐승의 희생 제사를 드린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한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신이 인간의 죄를 해결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가르쳐 주신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의 본질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만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고 죄가 용서되고 죄인이 구원을 받을 있다는 것을 우주에 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화목이 필요합니까?

화목이 필요한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변덕스럽게 화를 내신다거나 쉽게 분노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지속적이고 지치지 않고 끈질기고 타협함이 없는, 모든 악의 형태에 대하여 갖는 적대감입니다.

마치 자석이 같은 극끼리 서로 밀어내는 것은 단지 자석의 성질일 전혀 감정이 섞이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같이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진노하는 것은 죄가 사람을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람을 죽게 만드는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죄를 제거해야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화목해지는 것이고, 결과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소원대로 우리와 함께 사실 있게 됩니다.

누가 화목을 이룰 있습니까?

이방종교에서는 언제나 인간 측에서 신의 노여움을 달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이 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어떤 헌물이나 제물도 인간의 죄를 보상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킬 없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불의한 죄인을 아무 근거 없이 무조건 용서하시는 것은 자신을 불의하게 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은 심판과 죄에 상응하는 형벌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희생 제사는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제사가 하나님을 은혜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은혜롭게 대하기 위해 스스로 마련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자기 아들을 화목제로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속죄의 결과가 아니라 속죄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 3:16)다고 말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될 필요가 있었다면, 그분의 진노를 가라앉힌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화목제물이 하나님의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화목제물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하시는 방법이 달라진 것입니다.

희생 제물이란 무엇인가요?

어느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엄마는 자기 지갑에서 몰래 돈이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들 짓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충격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을 추궁했습니다. 아들은 가끔 돈을 빼간 것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럴게요.”라고 약속하라는 엄마의 말에는 반항했습니다. 아마 아들은 엄마 지갑에서 정도 빼가는 뭐가 그리 잘못인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같습니다. 엄마는 회초리를 들고 아들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아들의 여린 종아리는 금새 빨갛게 부어올라 대만 때리면 피가 같았습니다. 매가 닿을 때마다 아들은 발을 비비 틀며 아파했지만 결코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때리자니 살갗이 터져 피가 같고, 여기서 멈추자니 아이의 버릇을 고칠 수가 없을 같았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엄마는너를 도적질 하게 만든 것은 너를 낳아 기른 엄마의 책임도 있으니 엄마도 맞아야겠다.”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치마를 걷어 올리고, 아들을 때린 때보다 훨씬 강하게 자기 종아리를 후려치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엄마를 지켜보던 아들은 갑자기 엄마의 다리를 끌어안고 울면서 소리쳤습니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럴게요!” 가정에서는 동전 하나 없어지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엄마의 자아희생이 아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아들과 화목하게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위한 희생 제물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격은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화목을 이루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의 거룩한 진노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분노가 진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아들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을 때에, 아들 안에서 당신 스스로가 의로운 진노를 당하셨습니다. 죄인이 당할 진노를 스스로 당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심오함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주심으로 하늘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8:32).

 

십자가 :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입 맞춘 곳

만일 하나님이무조건적인 사랑절대적인 사랑만으로 죄를 다루신다면,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임에는 틀림없으나 결코 공의로운 분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사랑에 한정된 분이라면 어차피 처벌할 수도 없는 분이시고, 그분의 용서와 사면도 은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됩니다.

죄를 처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충족시킬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아담에게 말씀하셨던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2:17) 자신의 선언을 충족시키셨으며, 동시에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5:8)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공의와 사랑은 각기 독립된 위엄을 보존하면서도 하나로 연합되었습니다. 독생자 예수께서 흘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유심히 바라보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편으로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보게 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심(공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모두 충족되었고, 그리하여 십자가는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맞추는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나는 십자가에서 값을 받았다. 그대의 어떤 죄도 용서하겠다. 나와 화목하자 선언하는 동시에, “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벌을 받고 죽었다. 네가 죄를 버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너도 반드시 죽는다.”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유약한 것이 아니었고, 죄를 벌하는 두려운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인간의 사랑을 이끌어 내는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바로 십자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사람들과, 불신 때문에 멸망을 받을 사람들을 가려내는 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심판은 불가피한 것이고, 가지의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 3:18)라고 하였으므로, 그들에 대한 멸망의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믿는 자들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안에서 살았는지, 아니면 믿는다고 공언은 하였지만 믿음 없는 사람과 다를 없이 똑같이 살았는지를 구분하고 가려내는 심판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1).

바로 말씀이,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도 심판을 받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면 이제 심판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