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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하나님의 사면을 받아야 뜨거운 신앙을 가질 수 있다!

교회를 수십 년 동안 다닌 분들 중에서도 “왜 나는 뜨거운 신앙이 생기지 않을까? 왜 나의 믿음은 성장하지 않을까? 왜 나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릴 수 없을까? 왜 나는 습관적인 죄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라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야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주선에서 나오는 강력한 폭발력이 없으면 우주선이 하늘로 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강력한 에너지가 없으면, 육체의 요구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유혹을 물리치고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실망과 좌절의 그늘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논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기 전에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형이 내려져 있다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형수만이 복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형수다”라는 사실이 가슴깊이 저며 들어야만, 사형을 면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형수의 모습

몇 해 전에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사형수들은 자신의 사형집행일이 언제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전날에 “사형집행 문서”가 전달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아침이 되면, 간수 중에서 무술고단자 두명이 감방문 앞에 서서 “000면회”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형수에게 사형장으로 가자고 하면 아무도 방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형수들은 아침 시간에 면회왔다는 호출을 들으면 질겁을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짜 면회일수도 있지만,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죽음의 호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면회왔다는 말로 사형수를 불러내면, 사형수가 감방에서 나오는 순간 건장한 무도 간수 두명이 양쪽에서 팔을 꽉 낀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순간 사형수는 자신이 죽으러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서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사형을 정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감옥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서대문 형무소에 갖혀 있는 사람들만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형 선고를 받은 우리도 지구라는 감옥에서 사형수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집장가가고 집을 짓고 장사하니까 행복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형수입니다.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수들은 작은 감방에 갇혀서 죽음을 기다리는데, 내일 죽을지 모래 죽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돈내기 화투를 친다고 합니다. 기가 막힌 사실은, 내기 화투를 치는데 5백 원, 천 원 따면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 속에서 5백 원, 천 원 따기 위해서 다투고 싸우고 멱살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좁은 감방 속에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더 깨끗한 이불을 덮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옆에 있는 죄수들을 협박하고 못살게 군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잊고 살기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형 선고를 잊어버린 채 조그만 이익 때문에 속상해 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다투고 미워하지는 않습니까? 아주 작은 일 때문에 실망하고 화를 내고 우쭐거리지는 않나요? 조용한 시간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형수에게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사형수에게 돈이 의미가 있을까요? 사형수에게 명예가 필요한가요? 좋은 집과 자동차가 의미가 있을까요? 인생이라는 시간이 마쳐치면, 사형을 당할 사람들에게 무엇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을 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버리라는 말은 가치를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의미를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결국 완전히 파멸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마음 깊히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 3:10~12). 사도 베드로는 이 세상이 모두 불살라 없어질 것이므로 세상을 버리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이 되면, 모든 것이 파멸되고 하늘이 불에 타서 사라질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사형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용서입니다. 사형을 면제해 주는 것 외에 무엇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용서란, 사형을 면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형수는 100년을 감옥에서 모범수로 지내도 여전히 사형수입니다. 그러므로 사형수가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대통령이 내리는 사면령입니다. 그것만이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면하심이 없다면, 아무런 희망 없이, 하루하루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서대문 형무소로 가보겠습니다. 사형수는 간수들에 끌려서 형장으로 가는 복도를 지나게 됩니다. 그런데 사형수는 너무나 가기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다가 주저 앉아버리고, 어떤 사람은 복도 옆에 있는 창틀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발에 힘이 풀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간수들에게 부축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 걷다가 한숨을 쉬고, 어떤 사람은 하늘을 보면서 “어머니, 어머니”를 외치면서 웁니다. 그것이 사형수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용서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저와 여러분도 이 세상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두려움과 허무함 속에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의 용서를 만나지 못한 많은 사람이 자살하거나 우울증에 빠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현실을 잊기 위해서 세상 쾌락에 깊이 빠져듭니다. 수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외로움과 허망함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혼의 쉼과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형에 대한 말씀은 상당히 어두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형의 골짜기가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이해해야만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형장 안에서…

이제 사형장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형장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면, 방 건너편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본 사형수가 어떻게 될까요? 자지러집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눈동자가 풀린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율신경계가 조절이 되지 않아서 소변이 흘러나와서 바지를 흥건하게 적시게 됩니다. 이것이 사형수의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덮어주지 않는다면, 우리도 이런 모습으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사형수가 의자에 앉으면 집행관이 와서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고 그가 왜 사형을 당해야 하는지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판결문을 펴서 그 사람의 죄를 읽어줍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행 17:31).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누가 양(의인)이고 누가 염소(악인)인지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수들은 낮에는 재미있고 행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낮에는 자기 세상인 것처럼 거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조용한 밤이 되면 두려움이 밀려오게 됩니다. 사형이라는 형벌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잠을 자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내일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공허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낮에는 좋은 차와 좋은 집과 좋은 직장 때문에 행복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한 밤이 되면, 두려움과 공허함이 밀려옵니다. 왜 그럴까요? 죄인 줄 알면서도 붙잡고 있고, 버려야 되는 줄 알면서 놓지 않는 세속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낮에 마음 껏 즐겼던 위선과 쾌락이 밤에는 허무함이 되어서 나를 짓누르게 됩니다. 세미한 성령의 음성이 들려오면서 양심이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이 주는 쉼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께 용서 받는 경험 없이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 안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 안에 행복이 있고, 만족이 있고, 평안이 있고, 구원이 있고, 정죄와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 있습니다.

다시 형장 안으로 가보겠습니다. 사형수가 의자에 앉으면 머리에 까만색 보자기를 뒤집어 씌우고 그 몸과 팔과 다리를 밧줄로 단단히 묶습니다. 그리고 나면 집행관은 사형수로부터 최후 진술과 유언을 할 기회를 줍니다.

이 마지막 의식이 끝나면 위로부터 밧줄이 내려오는데 그것이 교수형을 집행하는 밧줄입니다. 밧줄을 사형수의 목에 걸고 나면, 곧 마루바닥이 열리면서 앉아 있던 의자가 밑으로 떨어지면서 몸이 공중에 매달리게 됩니다. 한참을 고통 속에서 몸이 흔들리다가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형집행이 완료된 것입니다.

 

목에 걸려 있는 밧줄이 풀리는 경험

여기서 우리는 희망에 찬 상상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형수가 최후 진술을 마치고 목에 밧줄을 거는 장면입니다. 이제 곧 마루바닥이 열리면 의자가 밑으로 떨어지게 되는 위기의 순간입니다. 바로 그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형장의 문이 쾅하고 열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형장 안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형집행을 중지하십시오”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대통령의 사면령이 도착한 것입니다.

사형수는 몇 달 전에 대통령에게 간절한 편지를 썼습니다. 자신은 비록 끔직한 죄를 범했지만 모든 죄를 회개했고 지금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부디 용서해 달라고 탄원했습니다. 사형수는 이런 편지를 대통령께 보냈습니다. “대통령께서 저를 사면해 주시면 남은 생애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완전히 바치겠습니다. 대통령과 국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대통령은 편지를 읽으면서 사형수의 심령 깊숙한 곳에 생긴 거룩한 변화를 알게 되었고, 마지막 순간에 특별 사면령을 내린 것입니다.

대통령의 사면령을 들고 온 사람은 사형수의 목에 걸린 밧줄을 풀어주고 온 몸을 묶고 있던 밧줄도 풀어주었습니다. 사형수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두 손을 번쩍 들고 “감사합니다!”를 외쳤을 것입니다. 소변으로 흥건히 젖은 바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뛰쳐 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달려갔을까요? 자기에게 사면의 은혜를 베푼 대통령께 달려갔을 것입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대통령의 은혜를 찬양하고 전했을 것입니다. 남은 생애 동안 그의 감사와 충성이 멈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를 용서 받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우주선이 강력한 폭발력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삭개오와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속에 생겼던 감사와 헌신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기쁨이 없다고 말합니까? 누가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솟아나는 감격이 없다고 말합니까? 누가 그리스도인이 죄를 버릴 수 없다고 말합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지옥불의 사형을 면제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서 “그럴 수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 2)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7~20)

우리 모두는 사형수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목에 밧줄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간에 우리는 지금 목에 밧줄을 걸고 의자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형수 의자에 앉아 있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예수님 자신이 그 의자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내 목에 걸려 있던 밧줄을 풀어서 당신의 목에 거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사형집행을 예수께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교회 다닌다고 해서 용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회개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의 마음 중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형수의 목에 걸려 있는 밧줄이 풀려지게 할 뿐 아니라 사형수의 마음속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 속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줍니다. 새로운 생명이 생겼기 때문에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되고, 전에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 때문에 오랫동안 자신을 묶고 있던 죄가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적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죄인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면 그의 심령 속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가슴 깊이 새겨지지 않으면, 말로는 죄를 용서 받고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정말 어떤 것인지 모르게 됩니다.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것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면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와 죄송스러움이 뒤범벅이 되서 충성을 맹세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 2)

하나님의 사면을 받은 우리가 어떤 죄를 마음에 품고 살 수 있을까요? 어떤 욕심과 어떤 이기심이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떤 유혹과 시험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배반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예언을 보면, 이기는 자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이긴다는 말인가요? 죄와 세상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나약하고 세속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바울은 어떻게 그런 간증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사면하시는 은혜를 받고, 지옥불의 사형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워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간증 속에는 용서 받은 죄인의 심령이 어떤 것인지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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