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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나를 따르라-2

사도 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인들이 극렬한 핍박을 받고 있을 때, 그리스도 교회가 갑자기 로마 황제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태양신교에서 기독교회로 개종하면서 기독교회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핍박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교회 안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이 들어오자, 교회는 세속화되었으며 은혜가 요구하는 대가에 대한 가르침도 점차 빛을 잃어버린 채 희미해져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12제자에 의해서 세워진 은혜에 대한 진리는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에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전수되었습니다. 은혜란 그리스도의 초청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분의 부르심에 응하는 데에는 희생적인 대가가 지불된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은혜의 복음을 이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날마다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비록 중세기 기독교회의 수도승 제도가 나중에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대표적인 예증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초창기의 경건한 수도승들의 동기와 목적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오는 세속적인 정신과 값싼 은혜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파수꾼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세기 천주교회의 지도자들과 신부들은 수도승 제도를 교회의 타락상을 가리는 가면으로 사용했습니다. 천주교회는 사람들이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를 지적하고 저항할 때마다 수도원의 고결함을 내세워 그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중세기 천주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수도원 사람들과 일반 교인들의 삶을 분리시켰습니다. 수도원은 특별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수도원 밖에 사는 일반 교인들은 적당히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오해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은 수도원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일반 교인들에게는 의무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충성이 높은 수준과 낮은 수준으로 나뉘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직분이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수도원 사람들은 경건해야 하지만, 일반 교인들은 세속적이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원도 변질되고 타락하게 됨으로서 중세기 교회 전체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온갖 거짓 가르침과 거짓 은혜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루터를 제자로 부르신 그리스도

1517년, 하나님께서는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수도승이었던 마틴 루터를 개혁자로서 선택하셨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살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진리를 깨닫고 수도원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수도원 사람들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도원 밖에 사는 일반 교인들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루터는 특별한 사람들만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기 위해서 세상이 주는 장미빛 유혹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마틴 루터 역시 엄격한 수도원 생활을 통하여 행함과 공로를 이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루터를 더 밝은 빛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직분은 소수의 제한된 수도승들의 개인적인 성취나 공로로 이용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적 눈이 열린 마틴 루터는 수도승 제도가 소박하고 겸손한 봉사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공로를 쌓으면서 극단적인 영적 교만으로 빗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에 세속과 탐욕의 정신이 수도원을 점령하자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버리려고 수도원에 들어온 수도승들이, 이제는 수도원 안에서 세상을 그리워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중세기 천주교회가 바닥까지 타락했을 때,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그물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처음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자신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자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죄를 용서받고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 심한 고행과 고통을 감수했지만, 여전히 실패하고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때마다 사탄은 루터에게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너는 죄를 범했지만 네 고행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셨다. 네 죄는 용서받았다. 그러므로 너는 현재의 경험 속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된다. 용서를 받았으니 안심하라.” 그러나 루터는 사탄의 미혹을 거절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엄청난 은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값비싼 은혜는 루터로 하여금 스스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정신까지 버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루터가 수도원을 뛰쳐나왔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기 시작하자, 유럽에 있던 거의 모든 수도승들이 그를 대항해서 일어섰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섭고 두려운 신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손을 뻗고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루터는 믿음의 손을 뻗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바울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마련해 주신 은혜는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은혜라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산산이 깨뜨렸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그를 붙잡고 있던 자신에 대한 평판도 하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스스로 의와 공로를 쌓으려고 애쓰는 대신에,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에 응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그� 결과, 그는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선한 생애를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수도원을 나와서 세상으로 간 것은 세상이 선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간 것이 아니라, 수도원도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가 세상으로 돌아간 사건은 유럽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갈 당시에 했던 세상의 포기는, 그가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에 했던 자아의 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루터의 개심은 그 당시 교회를 향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동기와 목적과 모든 것이 변화된 루터의 회개는 그 당시 수도승과 사제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원도 안전한 피신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매일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매일의 삶 속에서 헌신적인 순종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끊이지 않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루터를 오해하면 값싼 은혜를 받아들인다

오늘날 가장 비극적인 오해는 이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은혜의 복음을 발견한 후부터 더 이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정말 루터는 “은혜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제거해 준다.”라는 믿음을 가졌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루터는 세상에 살지만 세속에 대하여 결정적인 저항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거룩함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음을 설교했으며, 수도원 밖의 세상에서도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거룩한 경험을 지속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가 믿었던 신앙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의로운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고 믿는 신앙이 아니라, 죄를 버린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해 주심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가 받아들인 은혜는 값비싼 은혜였습니다.

루터는 용서를 가져오는 것은 자신이 힘들게 쌓아 나가는 공로나 희생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베푸시는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달픈 수도승 생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전보다 더욱 엄숙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베푸신 값비싼 은혜가 루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은혜는 루터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아들이 치르신 대가가 너무나 크기에 그것은 타락한 인류에게 은혜가 될 수 있으며, 그런 엄청난 은혜를 바라보고 묵상하는 사람마다 희생적인 대가를 치르면서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은혜는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오히려 제자의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한다는 강력한 소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매우 참담한 경험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와 용서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없앨 수 없었던 죄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의지해서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자, 그는 그러한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헌신과 충성을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대가로 지불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일생 처음으로 그리스도께 완전하고 순수한 순종을 드릴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사랑과 감사의 정신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완전한 헌신과 충성을 드릴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은혜는 그리스도 제자 직분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열성적으로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루터가 은혜를 강조했던 이유

루터는 오직 은혜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를 따르던 그의 후예들은 루터의 교리를 받아들였지만, 루터가 했던 회심의 경험을 이해하는 일에는 실패했으며, 루터가 했던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루터의 경험을 체험하지 못한 그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이 걷게 되는 제자의 길을 가르치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물론, 마틴 루터는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런 설교나 가르침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배경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는 그 당시에 가장 엄격한 방법으로 자기 의와 공로를 쌓으면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결심한 수도승들을 대상으로 설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에 젖어 있던 천주교회를 향해 설교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루터는 그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식과 고행과 엄격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 직분과 의무를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루터는 그 당시의 수도승과 사제들에게 가장 적합한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루터는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도록 만들 수 없으며, 오직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만이 우리에게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그가 수도원을 나올 때, 즉 두 번째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응하면서 했던 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루터는 엄청난 죄로부터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죄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은 루터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에 매달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은혜를 바라보았지, 방종과 게으름에 대한 핑계로서 은혜를 강조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얻은 해결책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를 따르던 후예들은 루터가 발견한 해결책을 자신들의 경험으로 깨닫지 못했으며, 은혜를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교리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은혜를 함부로 죄를 덮어 버리는 싸구려 덮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는 값싼 은혜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대담하게 죄를 범하라”는 말의 의미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말을 인용하면서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루터의 말은 이것입니다. “대담하게 죄를 범하라. 그러나 이보다 더 용감하게 그리스도를 믿고 즐거워하라.” 루터는 어떤 의도로 이 말을 했을까요? 이 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마음대로 죄를 범하라는 뜻일까요? 죄를 범하는 것보다 더 은혜를 모독하는 것은 없습니다. “대담하게 죄를 범하라”는 말은 불순종과 죄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서 말씀과 성령의 음성을 따르다가 부지불식간에 죄를 범할지라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히 4:16). 주 앞에 큰 죄를 범했을지라도 용감하게 죄를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죄를 숨기거나 변명하지 말고 빚진 자의 심령으로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대담하게 죄를 범하라. 그러나 이보다 더 용감하게 그리스도를 믿고 즐거워하라.”는 말은 날마다 죄와 싸우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성도들이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절망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했던 격려였습니다.

 

값싼 은혜 때문에 내린 재앙

만일 은혜가 우리의 심령 깊숙한 곳에 박히지 않고 지식과 문자적 교리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곳을 가게 되며, 우리가 원하는 모든 죄를 범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우리의 죄를 덮어 준다고 믿게 됩니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가장 싼값을 주고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고 합니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만족시켜 주는 설교를 하는 목사나 교회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래서 값싼 은혜를 전하는 교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했던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을 오해한 사람들은, 세속으로 물들은 신앙을 붙잡고 있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상태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덮어 주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교회는 세속과 부패 속에서도 ‘안전’을 느끼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의 교리 때문에 교회와 세상 사이에 차이가 없어졌으며,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선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처럼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세상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해도 아무런 책망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고자 애쓰는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교회 안에서 외로움과 고립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가는 것으로 그리스도인 의무를 충분히 수행했으며, 그것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에 가져온 참담한 결과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가 사람들을 제자로서의 의무와 직분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정했을 때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면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만 이해하는 값싼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싼값을 치르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값싼 은혜의 가르침이 만들어 놓은 결과들을 보면서 엄숙한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누가 값싼 은혜의 가르침 때문에 멸망하게 될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질 것입니까?

값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과 값비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이 모두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은혜의 복음이 많은 사람들의 눈에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얽혀져 있지만, 복음은 학문이 전혀 없는 시골 노인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합니다. 은혜의 복음은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만 정확히 이해하고 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 신앙은 크게 빗나가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은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고 자신을 위해 정결케 하사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독특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1~14, 킹제임스성경역)

루터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말과 가르침이 많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전혀 다른 의미로 왜곡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절망마저 느끼게 됩니다. 물론, 아직도 루터와 요한 웨슬리 같은 개혁자들이 가르쳤던 값비싼 은혜에 대해서 존경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값싼 은혜의 가르침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사람들은 매우 적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믿는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만일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말하는 바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값비싼 은혜를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가를 치르면서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가장 값싸고 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마틴 루터의 후예로서 마땅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쉽고 간편하며 값싸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루터의 가르침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말씀과 계명에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을 율법주의자로 몰아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말씀에 충성하는 신앙이 사라지면서 참된 제자의 직분에 대한 가르침도 거의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나 싼값으로 책정되었기 때문에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값싼 은혜가 가져온 결과가 부메랑처럼 교회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속과 부정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는 거대 교단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위선과 부도덕에 치를 떨면서 교회를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며, 세속으로부터 돌아서지 않고, 진리에 대한 확신과 순종이 없어도 “당신은 구원받았다.”고 선언해 주는 성직자들의 음성이 교회를 채우고 있는데 아무도 그 음성에 대항해서 분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땅히 책망받아야 할 죄인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죄를 가려 줄 것이라고 위로하는 무책임한 성직자들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은혜의 샘은 퍼붓듯이 나뉘어지고 있는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 제자의 길을 걸으라고 호소하는 설교는 점점 더 듣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가 세워 놓은 옛 신앙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값비싼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의 목숨을 단두대와 화형대에 던졌던 중세기 성도들과 개혁자들의 모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성도들이시여, 여러분은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서 내리고 있는 값싼 은혜의 재앙이 보이지 않습니까?

 

구원을 빼앗아 가는 값싼 은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불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도록 사람들을 끌어가는 것이 값싼 은혜의 가르침입니다. 값싼 은혜는 그리스도인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값싼 은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제자 직분을 잃어버렸으며,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도구가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값싼 은혜에 깊이 빠진 사람들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믿는 자의 구원을 확정한다. 한 번 구원받으면 아무도 구원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신다.”는 설교를 들을 때에 어리둥절하며 당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을 붙잡고 있으면, 값비싼 은혜에 대한 진리에 눈과 귀가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깊은 기만 속에서, 그들은 값싼 은혜가 자신들을 구원하여 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애 속에서 제자로서의 의무와 순종을 이끌어 갈 만한 실제적인 능력이 결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을 위한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지 못하게 되며, 성령의 능력이 삶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 은혜에 대한 오해는 다른 어떤 가르침에 대한 오해보다 무서운 재앙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대다수의 교인들이 참된 제자의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정통이라고 불리는 교단의 교인들로 인정해 줄지라도,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제자 직분(discipleship)과 은혜 사이에 존재하는 긴밀한 관계를 반드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리스도 교회를 이토록 참담하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값비싼 은혜, 진짜 은혜

수많은 사람들이 까마귀처럼 값싼 은혜라는 시체 주변에 모여들어서 그것을 파먹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를 받아들인 교회는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복음에서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세속과 허무함과 파렴치함이 교회를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짜 은혜를 발견한 사람은 이 악한 세상에서 경건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확신과 영혼의 평안을 갖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사탄의 권세를 이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풍요로움을 만끽하게 될 것이고, 하늘 시민으로서의 확신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2~14).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6,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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