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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어느것이 진짜인가요? 사도행전 2장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 방언

서점에 있는 방언에 대한 책들과 인터넷에 있는 방언에 대한 논란을 정리해 보면, 한가지 분명한 흐름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방언에 대한 의견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방언에 대한 두 가지 견해는 너무나 반대되는 주장이고,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절도 전혀 다르기 때문에 결코 합쳐질 수 없는 평행선처럼 보입니다.

1. 외국어 방언: 기독교회 안에 “방언은 외국어다.”라는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서적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오순절 때 제자들이 받았던 방언이 진짜라고 주장합니다. 방언이 외국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말씀에 집중합니다.

2.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의 언어다.”라는 견해가 있는데,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방언은 거의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성서적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이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하던 방언이 진짜 방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성서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4장 말씀에 집중합니다.

두 가지 견해 중 어떤 것이 진리일까요? 첫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1부에서 살펴보았으므로 2부에서는 두번째 견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부족한 인간의 체험을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는 성도들은 이 기사를 통해서 더 밝은 빛과 진리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지혜와 성령의 감동하심이 독자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고린도를 알아야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보인다!

고린도 교회에서 하던 방언을 살펴보려면, 고린도 지역과 그곳에 세워진 교회 형편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정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던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지적했습니다. 교회 내의 분쟁, 세속화, 거짓 복음의 침투, 상상을 초월한 성적 타락, 신도들 간의 소송 사건, 결혼 문제, 여자의 복종, 성찬식 문제, 은사와 방언에 대한 문제, 부활의 부정, 등등. 고린도 교회가 갖고 있던 문제 하나 하나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지금처럼 타락하고 세속적인 사회에서도 고린도 교회처럼 문제가 많은 교회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 고린도 교회에는 그렇게 많은 문제가 있었을까요?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고린도 지역이 갖고 있는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고린도 같은 곳에서 교회의 순결을 유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고린도는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처럼 행동하다.”라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고린도”라는 단어가 동사로 쓰였을 때는 “창녀와 관계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 시 중앙 높은 곳에는 아프로디테(라틴어로는 ‘비너스’) 신전이 있었는데 그 신전에는 1,000여 명의 여사제들이 예배의식으로 성욕을 불태웠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시에 있던 여사제들의 음란한 종교 의식에 대해서 성경주석가 크리스 웰 박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고대 고린도 앞에는 장엄한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는데 사랑과 미의 여신이 성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신전에는 여사제들이 이교적인 음란한 종교 의식을 집전함에 따라 무아경의 광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음란한 광란에 빠진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였는데 그런 광경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흔한 것이었다.”(Dr. W.A. Criswell, The Batism, Filling & Gifts of the Holy Spirit, Ministry Resources Library, 1966, p.113)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 당시 고린도 시의 거리를 활보했던 남창들을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긴 것입니다.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고전 11:14).

고린도 시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이방 종교의 방언이 창궐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교의 방언이란 광란의 상태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주문과 지절거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회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도 그 뜻을 모르고, 듣는 사람들도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방언을 하면서 “우리가 하는 방언은 고린도 교회에서 했던 방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사도 바울은 그 당시 고린도 시를 휩쓸고 있던 이방 종교의 여사제들이 마약을 태우면서 하던 무아지경의 방언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우상숭배자들의 지절거림과 같은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인정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사도 바울은 단 한 번도 고린도 교인들이 하던 방언이 이교도들이 하는 방언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지적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방언을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책망하면서 문제를 고치라고 했습니다.

2.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던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에서 단 한 번도 고린도 교인들이 하던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칭찬하거나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방언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장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에 대해서 어떤 말을 했고, 무엇을 지적했는지 독자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의 “알 수 없는 방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5절)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6절)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7절)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9절)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10,11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13절)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14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16절)
“너는 …. 잘하였으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17절)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9절)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22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23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27절)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28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33절)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린도전서 14장 40절-마지막 절)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방언을 하되 통역을 해서 올바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방언은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고린도 지역의 이교도들은 무아지경 속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했는데,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무질서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서 예배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훈계한 내용이 고린도전서 14장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왜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게 했는가?

고린도 지역에는 두 개의 유명한 국제 항구가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여러 민족과 인종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다양한 외국어가 사용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도 여러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예배에 혼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통역이었습니다. 외국어로 예배드리는데 통역이 없다면 어떨까요? 미국에는 여러 인종이 모이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데 통역이 없으면 예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설교자가 영어로 설교하면 한국 사람을 위한 통역이 있어야 하고, 중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을 위한 통역이 있어야만 설교와 기도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언어로 예배드릴 때보다 여러가지 배려가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통역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5,9,10,11,13절).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데 통역해 주는 배려가 없었습니다. 통역이 없었기 때문에 방언을 해도 알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을 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28절). 그뿐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방언을 하니까 예배가 무질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을 해도 질서를 지키면서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27절).

독자 여러분, 이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보이십니까? 바울은 만약 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를 사용할 때는 통역을 해야 하는데, 통역하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차라리 조용히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묵상으로 교통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28절). 바울이 왜 이런 조언을 했을까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무질서하게 예배드리는 것은 경건한 예배 분위기를 해치는 일이며,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와 예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을 책망하는 말씀의 keyword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통역하지 않으면…유익하지 않으며…음을 분별하지 않고…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않으며…허공에다 말하고…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해서 야만인이 되고…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며…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여 하지 말고…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며…순서를 따라 통역하고…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교회에서 믿은 자들끼리 모여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니”(22절). 비록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아무리 많이 설교하고 기도할지라도, 듣는 청중들이 이해할 수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통역을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5, 19절).

오늘날 기독교회에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방언이라고 부릅니다. 방언하는 사람도 그 뜻을 모르고, 듣는 사람도 그 뜻을 모릅니다. 뜻을 모른 채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가 응답되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고린도 교인들이 했던 방언이라고 믿으면서, 방언은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래전부터 기독교회가 치명적인 혼돈 가운데 빠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깊은 혼돈 속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교도의 신전에서나 들을 수 있는 “지절거림”이 수많은 교회들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정말 두려운 상황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인터넷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방언은 하늘의 언어입니다. 천사가 인간의 몸을 빌려서 하는 말입니다. 사람마다 방언이 달라지는 이유는 각기 다른 천사의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언의 소리가 달라지고 음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방언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일명 ‘랄랄라 방언’부터 찬양 방언, 신음처럼 들리는 방언, 아름답게 들리는 방언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방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을 통해서 나온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황홀하기 때문에 무슨 방언을 했는지 기억도 못합니다. 듣는 청중도 그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하늘의 언어이고 천사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하늘의 언어를 즐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붙잡으면 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했던 방언을 2천 년이 지난 후에 내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그들이 했던 하늘의 방언을 나도 할 수 있어서 감격하게 됩니다. 방언이 없으면 오랫동안 기도할 수 없고, 내 영혼이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방언이 없으면 경건의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방언을 하면 모든 고통과 문제를 잊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주셔서 하나님과 비밀을 나눌 수 있게 해 주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합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얼마나 바울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생각입니까! 성경에는 오직 하나의 방언이 있는데, 그것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이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방언이며, 설교자와 듣는 청중이 다른 언어를 사용할 때를 위한 방언이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한 방언입니다.

 

칭찬이 아니라 책망

우리는 바울이 단 한 번도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을 칭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문제를 지적하고 책망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에서 총 14권의 편지서 중 고린도전서에서만 방언을 다루고 있는데,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은 현대 기독교회가 하는 방언이 성서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방언하는 모습을 보면서 책망했습니다. 왜 책망했을까요?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 안에 모여서 자기들끼리 방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교인들이 모여서 상황에 맞지 않게 방언을 난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인데, 교회 안에서 믿은 자들끼리 모여서 서로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서 예배드리는 모습이 바울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요? 바울은 “미쳤다.”고 했습니다.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3).

 

오직 하나의 방언

우리는 사도행전의 방언(외국어)이 고린도 교회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도 오순절에 제자들이 했던 처음 방언과 동일한 ‘외국어’였습니다. 성경에는 오직 하나의 방언만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동일한 방언입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이 있고,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Q. “원래 방언은 오순절에 내린 방언밖에 없었지만, 그 후에 새로운 방언이 추가되어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생기게 된 것이 아닙니까?”

A. 정말 새로운 방언이 추가되었을까요? 성경은 오직 하나의 방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AD 57년에 기록한 편지서이고, 사도행전은 AD 62년에 누가가 기록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이 고린도전서보다 나중에 기록되었는데, 적어도 사도행전 시대까지 방언의 은사는 ‘외국어’였습니다. “내(베드로)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고넬료와 집안사람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오순절)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 11:15).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이 받은 방언은 제자들이 “처음”(오순절) 받았던 방언과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예전에는 몰랐고, 사용하지 않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4~46). 이방인 고넬료는 로마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행 10:1). 그러나 방언의 은사가 내리자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과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임을 들”었다고 기록했습니다(행 10:46).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은사는 외국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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