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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할 말씀

가장 아픈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체험’을 인정하지 않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이고 아픔입니다. 그러나 참된 겸손은 하나님 말씀 앞에 자기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 말씀에 어린아이와 같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체험, 자신의 입장, 자신의 견해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독자 여러분이 갖고 있는 방언에 대한 생각과 견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어떤 분들은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버리고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가 ‘나’를 포기하고 말씀을 붙잡아야 할 때입니다. 아프더라도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편집실>

 

‘은사장’ 전체를 보아야 오해가 풀린다!

전체 숲을 보지 못하면 오해가 깊어지고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방언에 대한 오해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몇 가지 성경절에만 집중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과 14장, 세 장을 하나로 묶어서 ‘은사장’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12장에서 은사의 본질에 대해서 다루었으며, 13장에서는 사랑 없는 은사의 문제점과 사랑의 가치를 강조하다가 14장에서 문제의 핵심인 고린도 교회의 방언 문제를 지적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흐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제3부 기사는 ‘은사장’에 나오는 단 하나의 성경절을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그 말씀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입니다. 오늘날 방언을 하는 개인이나 교회 모두 입을 모아서 강조하고 있는 말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의 흐름 속에서 14장 말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방언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

고린도 지역과 교회에 대한 성경학자들의 저술은 대체적으로 일치합니다. 고린도에는 두 개의 국제 항구가 있어서 여러 항로가 교차했기 때문에 상인들과 외국인들의 왕래가 많았습니다. 고린도는 헬라인, 로마인, 수리아인, 아시아인, 이집트인, 유대인들이 섞여서 살아가는 다인종, 다문화 도시였습니다. 그런 환경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도 여러 인종이 모여들었고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이 방언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각처에서 이주한 다민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종족의 언어들을 구사하면서 “내가 하는 언어는 성령께서 주시는 방언이다.”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고린도 지역의 거대한 신전에서 이교도들이 지절거리는 방언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았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은 “우리도 방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큰 능력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은사, 특히 방언에 매달리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은사의 정신을 잊은 채 방언 자체에 매달렸습니다.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에서 은사의 본질과 사랑을 설명한 다음, 거기서 마련된 참된 은사의 기준을 근거로 14장에서 본격적으로 방언 문제를 집중해서 다루었습니다. ‘은사장’을 살펴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현대 기독교회가 갖고 있는 은사 문제를 점점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속에서 우리 자신과 교회의 모습을 거울에서 보듯이 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의 본질에서 떠난 고린도 교인들

방언을 마지막에 놓은 이유: 고린도전서 12장 중반부에 여러 가지 은사의 종류를 기록하면서 가장 먼저 “지혜의 말씀”을 썼고 마지막에 “방언 말함과 통역”을 기록했습니다(8~10절). 왜 그렇게 순서를 정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과 진리’이므로 지나치게 방언에만 매달리지 말라는 뜻에서 방언을 맨 끝에 넣은 것입니다. 12장 마지막 부분에서도 그런 의도는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 12:28). 이어지는 성경절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사도가 가장 먼저 나오고 방언을 마지막에 나옵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 12:29~30). 카슨 교수는 바울이 기록한 은사의 순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가서 바울은 방언을 확연하게 평가 절하합니다…그는 의도적으로 은사 목록에서 방언을 가장 끝에 위치시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이라는 은사를 너무 높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D.A. Carson, Showering the Spirit, BakerBooks, 1987, p. 36)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현대 기독교회 속에도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무덤에서 나와 현대 기독교회를 보면서 은사의 순서를 기록한다면 어떤 순서가 나올까요? 고린도전서 12장과 비슷한 순서가 나올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는 방언하는 사람만 가득하고, 어떤 교회는 귀신 쫓는 일에 집중합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문을 여는 순간 방언 소리가 들려오고, 어떤 교회는 교회 문을 여는 순간 안수받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길까요? 특정 은사를 지나치게 높이기 때문에 그런 교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방언이 잘 터지고 병이 잘 낫는 교회라는 소문이 나면 그 교회는 대형 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어떤 상품이 잘 팔리면 너도 나도 그 물건을 파는 장사꾼처럼, 어떤 은사 때문에 교회가 성장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교회들이 앞을 다투어 그 뒤를 따라갑니다. 현대 기독교회에서 가장 각광 받고 있는 교회 성장법은 기복 신앙과 방언입니다. 말씀과 진리는 사라지고 은사와 이적만 난무한 현대 기독교회를 보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은사의 본질을 설명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은사를 구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주목해야 할 성경절입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에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누구에게, 무슨 은사를, 언제 주실지 결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제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은사는 달라고 떼를 쓴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하고 부리시는 것이지 우리가 성령을 사용하고 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은사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처럼 방언과 같은 특정 은사를 사모한 나머지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은사에 매달린 결과 교회 안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바둑의 급수를 나누고 태권도 도복의 띠 색깔을 구별하듯이, 은사의 등급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누가 누구보다 더 영적인 ‘고수’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영적 열등감에 시달리고, 어떤 사람들은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신앙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외식과 위선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새 신자가 방언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주변에서 그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은근히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도 생깁니다. 신앙 연륜이 오래된 교인들 중에 방언이 아직 터지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신앙없는 사람’으로 볼까 봐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절박한 심령으로 더욱더 열심히 매달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로부터 받아야 할 은사를 흉내 내고 연습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옆 사람이 하는 방언 소리를 흉내 내려고 애쓰게 됩니다. 지금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방언 전문 강사들이 전국 교회를 돌면서 방언을 구하는 신자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 모습을 지켜본다면 뭐라고 말할까요? 지금 교회 안에서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그 모습을 보고 웃지만, 나중에는 울게 됩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는 성도들은 은사와 방언 때문에 죽어 가는 교회를 보면서 탄식하고 통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속에 내 가족과 형제와 부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해결책: 바울은 12절부터 16구절에 이르는 긴 비유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설명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12,21,26,27). 눈이 발을 무시하고 손이 발가락을 무시하면 몸이 어떻게 될까요? 고린도 교회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내가 가진 은사가 네가 가진 은사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에서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 나는 너희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이겠노라”(고전 12:31, 킹제임스 영어성경). 바울이 말한 “더욱 큰 은사”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바울은 12장 마지막 절에서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한 다음에 13장 1절부터 “사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만을 위해서 쓴 글이 아닙니다. 12장에 나열한 은사와 방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 “사랑”을 설명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바울은 13장 1절부터 고린도 교인들이 하고 있는 방언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은사의 순서에서는 가장 끝에 있었던 방언이 문제를 일으키는 면에 있어서는 가장 먼저 지목되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마음에 사랑이 없은 사람들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당신들의 눈으로 볼 때는 방언이 대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의 방언뿐 아니라 그보다 높은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어!”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무시한 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3장 1절을 이용해서 방언을 이렇게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방언은 천사의 말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에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서점에서 방언의 중요성을 다루는 책을 살펴보십시오. 인터넷에서 방언을 강조하는 동영상을 찾아보십시오. 모두 예외 없이 고린도전서 13장 1절의 “천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들려오는 방언의 치명적인 결함을 바울이 계속해서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말”이라는 한마디를 가지고 무마시켜 버리고 있습니다.

 

방언이 “천사의 말”이 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

첫째, 방언을 문자 그대로 “천사의 말”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본문의 의미와 전혀 다르게 됩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성경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 나오는 “천사의 말”은 바울이 자신의 논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에서도 바울의 과장법은 계속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이런 표현들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성경은 너무나 이상한 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둘째, 방언이 정말 하늘에 있는 “천사의 말”이라면 천사들에게 큰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장차 방언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shall cease)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수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만일 방언이 “천사의 말”이라면, 장차 방언이 중단될 때 천사들은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하늘에 가서 언어를 잃어버린 천사들을 만나서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요? 천사들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서 배워야 하나요?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절 한마디에 붙잡혀서 말씀을 해석하면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방언도 그치고”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까지 방언은 그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 복음 전파를 위해 주신 방언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강림하셔서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가시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신 방언은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예언과 지식의 은사도 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가서도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사랑은 진짜 은사와 가짜 은사를 구별하게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 은사 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런 은사는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은사를 질투하지 않고, 자기 은사를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사랑이 있는 진짜 은사와 사랑이 없는 가짜 은사의 가장 큰 차이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가 아닌가”입니다. 어떤 은사를 통해서 자기의 유익을 구한다면, 그 사람의 은사는 성령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오늘날 많은 사람이 “방언을 해야 오래 기도할 수 있고, 방언을 해야 마음이 뜨거워지며, 방언을 해야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방언의 이유와 목적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은 “나”를 위해서 하는 방언은 은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 “가르치는 은사”를 주시고, 환자를 치유하기 위해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시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방언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확신과 자기 경건과 자기 감정을 위한 은사는 하늘로부터 온 은사가 아니며, 사랑이 없는 은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은사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정신이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은사를 받은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고 높이기 때문에 더 밝은 빛이 왔을 때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체험을 강조하면서 말씀을 소홀히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사대”보다는 “내가 체험한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은 신비주의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와 방언에 매달리면 체험 위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 위에 체험이 있게 됩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요 14:15).

13장의 결론: 바울은 “사랑장”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12장과 13장을 마친 다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빠져 있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다루기 위해서 14장으로 넘어갑니다. 14장으로 들어갈 때 바울은 어떤 말씀으로 시작할까요? “사랑을 구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은사와 방언의 시작과 끝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선으로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을 바라보아야 오해가 풀리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방언의 난발로 혼돈에 빠진 고린도 교회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14장은 “방언장”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따라서 은사를 구하라”는 말로 14장을 시작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는 사랑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왜 예언에 관심을 가지라고 했을까요? 구약 시대 예언하는 은사를 받은 선지자들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예언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봉사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얻었습니다.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은사의 참된 정신을 잃어버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게 되었고,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방언 대신에 “예언을 하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이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문화, 다민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3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고린도 시는 국제항구도시이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 지역에서 가장 주목받을 수 있는 은사는 방언이었습니다. 또한 고린도 지역의 거대한 신전에서 지절거리는 방언으로 예배드리는 이교도들에게 고린도 교인들은 “우리도 방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해서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큰 능력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은사, 특히 방언에 매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방언에 매달린 고린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까요? 14장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 문제를 지적하고 책망하기 위해서 기록된 장입니다. 이제부터 나누는 말씀이 현대 기독교회가 갖고 있는 방언에 대한 오해와 혼돈의 뿌리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에서 살펴보았던 은사의 본질과 참된 사랑을 기초로 해서 고린도 교회의 방언 문제를 살피게 되기를 바랍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지지하는 책들 중에서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가장 중요한 성경절로 제시하지 않은 책은 “단 한 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 성경절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성서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기둥과 같은 성경절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만 올바로 해석하면 방언 문제 95% 이상이 해결됩니다.

바울은 왜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을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만 하라고 했을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통역 없이 혼자 방언하는 것이 하나님과 자신만 아는 어떤 신비한 비밀을 서로 나누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14장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판단할 때 우리는 2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방언이 은사의 본질과 사랑에 기초해서 복음 전파와 봉사로 사용되고 있는가?

2.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는가? 칭찬하고 있는가?

2절은 칭찬일까요? 책망일까요? 만일 이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면서 홀로 황홀경에 빠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12장부터 시작해서 14장이 끝날 때까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칭찬한 적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하던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2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 전체 흐름을 무시하고 2절만 뽑아내서 읽으면, 큰 오해를 하게 되고 결국 바울의 책망을 칭찬으로 왜곡하게 됩니다. 물론, 바울이 “방언하기를 구하라”는 권면을 했지만, 그것은 방언이 분명히 성령의 은사 중 하나였기 때문에 원칙적인 측면에서 했던 말씀이고, 통역 없이 하는 방언에 대해서는 항상 책망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으로 2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unknown tongue)으로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나니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그가 영안에서 신비들을 말하느니라”(고전 14:2)

바울은 왜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통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절 이후에 바울은 계속해서 “통역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통역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고전 14:28). 한국 사람이 미국인 교회에 가서 한국어 방언으로 설교하면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로 남을 뿐입니다. 통역자가 없으면 설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절을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너희가 아무리 방언을 해도 통역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 주변에 사람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너 혼자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너희의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들이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너희가 통역 없이 방언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알아들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 혼자서 하나님께 신비를 중얼거리는 것이지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다!”

2절은 매우 심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모든 은사는 사람을 향해서 이루어지는데, 방언만 하나님을 향해서 신비를 나누는 것이라고 믿는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2절 말씀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해서 신비한 분위기에 빠지고 마음을 뜨겁게 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방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직통으로 연결해서 신비를 이야기하는 체험이 아닙니다.

바울은 2절의 내용을 한 번 더 반복하면서 강조했습니다. 2절에서는 바울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나니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그가 영안에서 신비들을 말하느니라”라고 표현했는데, 9절에서는 똑같은 말을 “허공에 말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 14:9).

방언도 은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 “복음 전파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 목적에서 벗어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은 홀로 황홀경에 빠져서 즐기는 “감정 놀이”일 뿐입니다. 2절 이후의 말씀을 살펴보면 2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은사와 방언에 대한 기준으로 제시했습니다(고전 13:4).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는 이러한 기준과 상반되는 듯한 말씀이 나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오늘날 “방언”을 강조하는 모든 책, 모든 강의는 고린도전서 14장 4절을 이용해서 “방언은 자기의 덕, 즉 개인의 경건을 위한 도구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사랑이 있는 은사는 자기를 세우지 않고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사는 모두 복음 전파와 봉사를 위해서 주셨는데, 방언만 “자기의 덕을 세우”라고 주셨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바울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은사의 기준을 스스로 뒤집는 것이 됩니다. 말씀의 일관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날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을 해야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고, 경건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외롭고 힘들어도 방언을 하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영성을 세울 수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오늘날의 방언은 철저하게 “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자기 덕을 세우”라는 말이 정말 그런 뜻일까요?

고린도전서 14장 4절은 번역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덕”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원문의 의미는 “자기를 세우다, 자기를 나타내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원문에는 “알지 못하는”(unknown)이라는 단어와 “그러나”(but)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영어성경은 4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운다(나타낸다).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운다”(4절). “He that speaketh in an unknown tongue edifieth himself; but he that prophesieth edifieth the church”(1 Cor 14:4). 이 말씀은 “알지 못하는 방언”을 해서 자기를 높이라는 뜻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방언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책망의 말씀을 “자기를 높이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한국 교회에 방언에 대한 깊은 혼돈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책망했을까요? 고린도 교회는 통역 없이 방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방언으로 가르치고 설교했습니다. 그런 태도는 고린도 교회가 다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없고, 사랑을 기초로 한 방언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상대방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방언하는 것은 단지 “내가 방언할 수 있다.”는 영적 우월감과 자기 만족을 즐기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리새인처럼 “나타내고자 하는 정신”으로 방언을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제시한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통역”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가장 강조한 메시지는 “방언은 반드시 통역하라.”입니다. 그는 14장에서 5번에 걸쳐서 방언은 통역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통역되지 않는 외국어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2~13)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순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27)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고전 14:28)

방언이 통역되지 않으면 복음이 전혀 청중에게 전달될 수 없습니다. 단지 “내가 방언을 할 줄 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데서 끝나게 됩니다. “자기의 덕을 세우”는 데서 끝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주신 방언이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자가 없는 고린도 교회에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을 하라고 충고했던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교리를 가르치고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고전 14:1~2, 5~6).

 

“내가 만일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an unknown tongue)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spirit)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킹제임스 성경)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가리키면서 바울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했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만일”이라는 가정법으로 이 말씀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은사의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에 가정법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14절의 전반부는 “내가 만일 고린도 교인들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면….”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책망을 칭찬으로 왜곡함으로써 이상한 오해가 생겼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한 구절만 떼어서 보면 안 됩니다.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이 14절을 떼어 내어 이런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방언 기도는 영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나의 깊숙한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방언 기도입니다. 방언으로 하지 않으면 5분도 기도하지 못하는데, 영으로 기도하니까 몇 시간을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내 영은 나의 이성과 마음이 알 수 없는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마음은 모를지라도 내 영은 그 모든 비밀을 아버지께 털어놓고 싶어 합니다.”

“영으로 기도해도 마음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어지는 15절에서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이 “영”과 “마음”을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곧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영으로 찬미하”는 것은 곧 “마음으로 찬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마음”입니다. 영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기도하면 마음에 열매가 맺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에서 청중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기 때문에 흡족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아무리 방언으로 기도해도 알아듣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없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의 관계에 대해서 리처드 개핀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바울의 서신에서) ‘마음’과 ‘영’은 근본적으로 동의어이다. 아니 적어도 이 두 용어는 인격의 서로 대치되는 별개의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성경은 전인을 다루고 있다. 인간이 마음과 뜻과 혼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새로워진 마음으로 자아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다루고 있다.”(리처드 개핀, 성령 은사론, 91~93쪽).

영으로 기도하는데 마음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는 상태란 실제적으로 어떤 상태일까요? 최면이나 환각 또는 마취 상태가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기가 하는 것을 자신이 모릅니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오늘날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말 ‘영으로 기도하는데 마음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최면이나 환각 또는 마취상태로 기도하고 있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방언을 하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소리나 음을 냅니다. 또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방언을 했던 사실조차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18~19절에서 14절의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보여 주면서 다시 책망합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unknown tongue, 알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8~19).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나는 소아시아와 로마를 다니면서 온갖 방언으로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고린도 교회 교인들보다 더 많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비밀을 만 마디 하는 것보다 깨달을 수 있는 말 다섯 마디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

 

말씀이 위에 있습니까? 체험이 위에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이 방언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은 정말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에 대해서 오해하면 이상한 신비주의로 흘러가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만나야 할 하나님을 느낌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으로 오해하면, 말씀은 사라지고 체험만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보다 내가 느끼는 체험이 중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사실은, “내가 이렇게 느꼈다. 내가 이렇게 체험했다.”에 집중하게 되면, 내 경험에 맞추어서 말씀을 재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의 해석이 이상하게 왜곡된 것입니다. 내 경험이 말씀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말씀을 내 체험 수준으로 끌어내리게 됩니다. 결국, 입으로는 말씀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체험을 가장 높은 위치에 놓게 됩니다. 체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에 자신을 높이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체험했고 내가 이렇게 느끼는데 왜 나를 말씀으로 제한시키느냐?”고 항변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말씀과 체험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체험과 진리 중 어느 것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가를 결정하는 전쟁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체험이 말씀을 밀어내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말씀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의 체험을 강조하는 신앙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체험이 말씀을 밀어냄에 따라 각 교파가 갖고 있는 신앙의 정체성이 사라지게 되었고, 마르틴 루터의 정신과 요한 웨슬레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구별하는 중요한 잣대가 “이 교회는 방언을 하는데 저 교회는 방언을 하지 않는다.”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뢰아인들처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지 않으면 “느낌과 체험”이라는 미혹에 넘어가는 때입니다(행 1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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