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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방언에 대한 인터뷰 Q&A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서울의 어떤 교회에 방언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동료 목사들과 교인들로부터 압박을 느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신앙이 깊은 목사님의 어머니까지 아들이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염려를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헬라어로 주기도문을 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 시간 동안 연습한 결과, 헬라어로 유창하게 주기도문을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아침 예배시간에 가족들과 어머니 앞에서 기도하는데 헬라어로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온 가족들이 드디어 목사님의 입에서 방언이 터져 나왔다고 기뻐하면서 축하해주었습니다. 헬라어 주기도문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들렸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이제 더 이상 방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축하를 받았습니다.

이튿날 어머니는 방언 통역에 뛰어난 은사를 받은 것으로 유명한 어떤 전도사님을 모시고 목사님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목사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내용을 알기 원했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목사님은 어쩔 수 없이 헬라어로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통역 은사를 받은 전도사님이 다음과 같이 통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말씀하십니다. 빨리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으셨습니다. 목사님, 마음 준비하시고 떠나셔야겠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그 명령을 귀하게 받아들이고 감사했습니다. 목사님은 한동안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이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금 제가 드린 기도는 헬라어입니다. 헬라어로 주기도문을 외운 것입니다.” 그 상황이 어떠했을까요? 통역 은사를 받은 전도사님은 매우 당황했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오늘날 방언에 대한 많은 의문과 의혹이 있는데 그중 몇 가지를 모아서 질문과 답변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하나님께 정직한 마음으로 나가는 영혼마다 진실과 진리를 깨닫게 되실 것을 확신합니다.

 

Q. “요즘 교회에서 하는 방언이 비록 의미가 없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통역하면 의미가 전달되고 복음이 전파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도 통역만 잘하면 되지 않을까요?”

A. 물론, 사도 바울은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3). 이 말씀은 알 수 없고, 의미가 없는 소리를 통역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방언 통역에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를 보여 주는 사례는 너무나 많아서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몇 해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통역 은사에 대한 실험 보고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통역의 신뢰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방언을 녹음한 후 통역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7명에게 각각 녹음을 틀어 주고 통역을 요청했다. 그 일곱 가지 통역 중 비슷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프리카어에 능통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방언 집회에서 그는 아프리카어로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러자 갑자기 근처에 있던 통역은사를 받은 사람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지금 이 형제가 방언으로 곧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했습니다.’”(John P. Kidahl, 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ongue, Harper & Row, 1972, p. 63).

오늘날 교회에서 똑같은 소리를 내는 방언이 여러 가지로 통역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교회는 어떻게 설명할까요?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통역하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둘 중 하나입니다. 통역하는 사람이 엉터리이거나 방언 자체가 통역이 불가능한 소리입니다. 물론, 둘 모두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들려오는 방언이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가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데, 왜 사람들은 고민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오늘 내가 느끼는 감정과 체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Q. “통역될 수 없는 소리도 언어인가요?”

A.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은 통역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5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고린도 교인들이 하던 방언(tongue)은 “통역될 수 있는 언어(language)”라는 뜻입니다. “통역될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은 그 말 속에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미가 없는 방언”은 결코 성경의 방언이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의미가 있는 방언도 통역하지 않아서 의미가 전달되지 않으면 그 방언은 단지 “소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의미가 있는 방언도 통역이 안 되면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인데 하물며 의미와 뜻이 전혀 없는 소리들은 무엇입니까? “허공”에 소리치는 것입니다.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 14:7~9). 방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명상하시고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Q. “바울은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방언을 해야 합니다!”

A.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이 말씀을 “알 수 없는 방언”에 대한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문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석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통역 없이 방언을 난발하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복음 전파와 봉사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할 은사인 방언이 자기 의를 세우는 데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망 때문에 방언의 은사 자체가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적극적으로 하라”고 말하는 대신에 “금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또한 “방언을 금하지 말라”는 표현 속에는 잘못을 범한 형제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방언을 잘못 사용해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지나친 정죄 속에서 좌절하게 되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 속에는 잘못을 범한 형제에 대한 바울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후 2:7).

 

Q.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날마다 여러 시간 동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영적으로 큰 유익을 얻게 됩니다. 내가 경건해지면 그것이 곧 교회를 세우는 일이 아닙니까?”

A. 방언으로 기도해야만 경건해진다면, 예수님은 하루 종일 방언 기도를 껴안고 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많이 그리고 강력하게 받았던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방언으로 기도했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오나요? 사복음 전체를 보아도 예수께서는 항상 정확한 언어로 하늘의 가르침과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기도문도 모든 사람이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방언은 반드시 통역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무시할까요? 왜냐하면 “내가 경건해지는 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라는 그럴듯한 거짓 가르침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은사는 다른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는 은사인데 방언만큼은 “나”를 위한 은사라고 가르치는 방언 신학이 세워졌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방언하기를 원하십니까? 왜 노력하고 봉사하고 수고하는 은사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능력이 나타나는 방언에 관심을 가지십니까? 오늘날 현대 교회는 방언에 대한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랄랄라 방언’으로 날마다 3시간 기도하면 경건해집니까? 날마다 하나님과의 비밀 대화로 얻어진 경건의 열매가 무엇인가요? 전에는 하나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충성스런 삶을 사십니까? 전에는 돈을 사랑했는데, 이제는 재물을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위해서 사용하십니까? 전에는 세상을 사랑했는데 이제는 복음을 위해서 삶을 바치십니까? 전에는 습관적인 죄에 묶여 있었는데, 이제는 그 죄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까? 방언을 하는 많은 사람의 고백은 “방언을 하기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에 끌려다니고 여전히 정욕적이고 세속적이라는 것이 방언하는 분들의 고백입니다. 참된 경건은 기도를 오래 하고 신비를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경건은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2~4).

 

Q. 사탄이 방언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요?

A. 사탄의 목적은 단지 “알지 못하는 방언”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 목사는 십여 년 동안 매주 방송에 나와 방언을 하고 귀신 쫓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보면서 하늘의 기적을 목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송 목사가 부인 몰래 다른 여인과 십여 년 동안 부정한 관계를 유지했던 일이 신문에 폭로되면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목사로서 무서운 죄에 빠져 있었지만, 사탄이 그에게 매주 이상한 지절거림을 주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보이는 거짓 이적을 나타냈기 때문에 기만당한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병을 주고 또 그 병을 고치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 사람들을 기만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 악령을 들어가게 하고, 또 사탄의 부하 악령을 쫓아내는 기만을 행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열매로 그들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열매로 영을 분별하라는 말씀에 이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해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이 말씀은 정말 두려운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방언을 하면서 많은 권능을 행해도 불법을 행하면 주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알지 못하신다고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것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라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사탄이 준 능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사탄에게 기만당하게 된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3절) 불법을 행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불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늘의 권능을 행사하기 원하면, 사탄이 그런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거짓 이적으로 그들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모습을 마지막 시대의 징조로 경고하셨습니다.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3-24)

말세가 되면 온 세상이 표적과 기사로 덮일 것이라는 것이 예수께서 주신 재림의 징조입니다. 말세가 되면, 사탄이 큰 표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데, 신앙이 없는 사람들만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도 미혹”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말세에 나타나는 사탄의 미혹으로 거짓 이적을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외면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사탄의 미혹에 기만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하면,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열매를 맺은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방언도 성령의 은사이므로 방언을 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관심을 먼저 성령의 열매로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거룩한 열매를 마음과 생애 속에 풍성하게 맺은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가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의 열매는 진리를 통해서 거룩하게 된 신앙과 성품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사람들에게 성령의 열매가 맺혀진다고 했습니까? 이어지는 24절의 말씀에 대답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히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이런 삶을 살지 않으면서 하늘의 권능을 구하는 사람들은 매우 위험한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모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는 그리스도인이 하늘의 권능을 탐하면, 사탄이 그에게 거짓 권능을 줘서 미혹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사탄 전략입니다.

오래 전부터 사탄은 하나님께 나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없애고 혼돈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마음에 죄를 붙잡고 있는 사람에게도 지절거리는 방언을 줍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방언을 줍니다. 심지어는 바람을 피우는 사람도 방언을 하고,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방언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이 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날마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방언을 보면서 “거짓 안전”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여전히 함께 하신다”는 완전한 기만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결국, 영혼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역사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사탄이 노리는 두 번째 목적은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기적에 익숙하고 취하게 되면 말씀에 대한 관심이 없어집니다. 예수께서 명하신 좁은 길과 순종에 대한 관심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알 수 없는 방언”을 하면 황홀한 느낌과 감정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마약과 같아서 한번 취하면, 그것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게 됩니다.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대신에 체험을 따라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 들어온 방언을 받아들이면 매우 위험합니다. 빠져 나와야 합니다!

 

Q. 성령을 받을 때 어떤 느낌이나 감정을 갖게 됩니까?

A. 성령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느낌과 감정이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써 감정의 극치를 기대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우리는 바람을 보지 못하지만 바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에 역사할 때 그것을 볼 수 없지만, 그분의 능력은 조용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거나 만지지는 못할지라도, 그분께서 해놓으신 결과를 볼 수는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화된다면, 우리의 생애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오직 변화된 생애를 통해서만 확증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비우고 마음의 우상과 죄를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대해서 자랑치 않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고전 2:10,12)

성령을 받을 때, 우리는 황홀함과 무아지경 속에 머물기보다는 오히려 더 침착하고 더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생애는 감정적 환희와 흥분으로 차있는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교회의 죄와 세속을 지적하면서 분노하셨고, 이스라엘의 죄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희생과 봉사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죄와 불의를 거절하셨으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 위한 이기심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런 삶이 성령 충만한 생애입니다. 예수께서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만 성령의 능력을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성령 충만함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행하는 순종의 삶으로 표시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사랑과 희생과 극기와 자아부인으로 꼴 지워졌습니다. 성령 충만할수록 이성적인 분별력은 예민해지며 하나님의 진리가 감정과 느낌을 지배하게 됩니다. 진리는 건전한 상식 위에 세워지며, 질서 있는 가정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고…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26,33,40)

 

Q. 기적은 모두 하늘에서 온 것인가요?

A.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오늘날 이 시대에도 나누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은사를 분석하고 사용할 때에 한 가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탄이 진리에 굳게 닻을 내리지 못한 사람들을 혼동시키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사탄의 활동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특징 지워질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살후 2:9). 사탄의 활동이 매우 기만적인 이유는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자칭하”고 있으며,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1:13,14). 그 기만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택하신 자들”까지도 미혹당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마 24:24).

이러한 말씀들은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교회나 성직자들을 모두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교회와 모든 종교적 체험 그리고 모든 기적을 시험해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기 위해서 말입니다(살전 5:21).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는 사도 요한의 또 다른 충고를 들어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그렇다면, 성경은 영을 시험하는 판단 기준으로서 어떤 것을 제시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5가지 성경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성령의 참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이며, 자신이 믿는 바가 성경의 진리에 일치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렘29:9)

어떤 사람이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으면, 그가 예언하는 바가 정확하게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 그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대표자로 설 수 있을 만큼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과 생애를 바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방언을 하고 병 고치는 은사를 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늘에서 내려온 은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그를 잘 알고 있는 믿지 않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감화를 끼칠까요?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양면을 보면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이상한 혼돈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내려주심으로써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사람은 혹시 자신이 다른 영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늘은 위대한 성령의 능력을 받기에 적합하게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하늘의 거룩한 선물을 줍니다.

4)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리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2~3)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셔서 시련과 고통 중에서 승리하셨던 것처럼,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분의 모본을 따라서 죄와 시험을 승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영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죄와 유혹에 대하여 승리하는 생애를 살아야 하며, 그러한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거룩한 생애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하늘의 선물이 내려지게 됩니다.

5)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사도 요한 역시 앞에서 이사야가 말했던 영의 구별법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견디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계시를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은 영을 분별하는 분명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적과 은사를 무조건 하나님의 영의 은사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대답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충고는 모든 기적과 은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Q. 현재, 성령의 은사와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A.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는 영원불변하지만, 진리를 이해하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진리를 검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기준점으로 해서 우리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판단해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시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경험을 진리 위에 놓으려고 애씁니다.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올바른 진리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치 있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사건을 관찰했을 때, 각기 다른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우리가 어떤 교단에 속했으며, 어떤 사람에게 성경을 배웠느냐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동일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있다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합니다.

A) 나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경험을 하였다.

B) 그런데, 나는 나의 경험과 매우 흡사한 경험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다.

C) 그러므로 나의 경험은 진리이다.

이와 같은 3단 논법에 의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성령의 은사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자신의 경험이 초대교회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해서 자신들의 경험이 진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수 있고,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최고의 증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영”에 의해서 진리를 척량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살후 2:10,11).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마지막 시대에 펼쳐지는 사탄의 대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한다고 공언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나거나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영적인 위치는 매우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만을 강조하면서 진리를 무시하는 사람은 감정적인 신앙을 갖게 되며, 진리를 주장하면서 사랑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율법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끝까지 따라가야 하며,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마음 속에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랑과 진리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성령)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니라”(요14:15~17). 사도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계명(commendment, 명령)을 순종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순종이야말로 자신의 경험을 시험할 수 있는 최종적인 판단 기준이며, 동시에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느낌 그리고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의 생애를 사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을 지배하는 영을 분별하는 최고의 기준입니다.

 

Q. 심리학자들은 오늘날의 방언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A. 성경에서 방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은 방언을 연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방언을 습득시켜주는 전문 강사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방언 전문가인 킬달 박사는 오늘날 교회에서 발견되는 방언의 학습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서 발표했습니다.

1. 방언을 연습시킬 때는 오직 방언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집회함.

2. 방언 강사는 간절한 마음으로 방언을 사모하도록 분위기를 상승시키고 있음. 음악과 통성기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음.

3. 방언 강사는 사람들이 특정한 소리를 내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방언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지속적으로 줌.

과학자들은 방언을 사모하거나 방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삶 속에서 받고 있는 스트레스와 고통이 방언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면, 방언과 스트레스 사이에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고 자신감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을 때, 방언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30% 사람들이 정신적인 불안을 겪었던 반면, 방언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85% 사람들이 정신적인 불안 때문에 고통당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정신적인 불안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람일수록 방언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학생은 시험과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클수록 방언을 해서 현실을 잊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John P. Kildahl, 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ingue, Harper & Row, p78.)

사람들이 방언을 추구하는 이유는, 방언 자체가 아니라 방언이 가져다 주는 효과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방언을 하면 현실에 있는 모든 문제를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방언을 하면 목사님과 교인들에게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방언을 하면 감정적으로 깊은 황홀함과 무아지경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방언을 하면, 핍박당하고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며 좁을 길을 걸으면서 돈과 세상을 포기해야 한다면, 방언이 여전히 인기가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애를 쓸까요?

 

Q.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언제,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요?

A.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이 되자 하늘로부터 큰 성령의 강림이 있었는데 그때 방언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의 표적으로 사용하시는 방언을 이방 종교에서 오래 전부터 하던 방언에서 가져다 쓰셨을까요? 오래 전부터 우상숭배자들이 그들의 신전에서 하던 주문과 같은 방언을 가져다가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나누어주셨을까요?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방언은 교회 안보다는 교회 밖에서 훨씬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종류의 방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상한 방언 현상은 그 뿌리를 성경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이방인들의 제사 의식에 두고 있음을 역사는 말해줍니다. 기원전 6세기에, “델피의 오라클”이라는 사람은 아폴로신과 뮤즈의 신의 영지라고 알려진, 그리스 중부에 있는 파르나소스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델피는 “술, 다산, 선정적 춤의 신”이라고 부르는 “디오니소스”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 의식 중에 분위기를 돋우는 선정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을 때, “피디아”라고 부르는 부족의 사제장은 이상한 연기를 들여 마시면서 황홀경에 빠져들어가면서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여 지절거렸습니다. 그 사제가 이상한 소리를 낼 때에 다른 사제는 그것을 통역을 했습니다. 그의 소리는 아폴로신에 관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추상적인 것이었고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New Mexico에 사는 미국 인디언들 속에서도 그와 비슷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 인디언들은 “페이요우티”라는 환각제를 마시고 둥글게 앉아서 몇 시간 동안이나 드럼소리를 들으며 종교적 노래를 부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몇몇 인디언들은 자극적인 몽상에 관한 말을 중얼거립니다. 이러한 제사 형식의 유사함 때문에 미국에서 오순절파 교회들은 미국 인디언들에게 인기가 가장 좋은 곳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교도적 미신을 믿는 아프리카의 부족들은 그들의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닭이나 염소 등을 제물로 드리고 여러 시간 동안 불을 중심으로 돌며 춤을 추며, 최면적인 리듬과 드럼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몇 사람들은 신접한 상태에 이르게 되고 혼령 세계의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마을 마법사나 사제가 그 말을 통역합니다. 이러한 의식은 오늘날에도 서인도의 Voodoo Catholic 들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방적인 제사의식들이 처음 미국 교회에 들어온 시기는 1800년도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들이 미국에 온 후 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압 받아서 교회에 나갔지만, 그들은 스스로 성경을 읽어서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비록 아프리카의 서로 다른 부족들에 속해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신령적 춤과 신접한 소리를 낸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노예들은 그들의 신접한 소리를 방언의 은사로 오해하게 되었고, 새로운 방법의 방언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강한 리듬의 음악과 같이 진행되는 이러한 광신적 의식은 미국 남쪽 지방의 교회들에서 처음 받아들여졌으나, 당시의 기독교 단체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Holy Rollers”라고 비난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접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의식도중에 독사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마가복음 16장18절에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잘못 오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독사를 사냥하여 들고 있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백인들의 오순절파 운동은 1906년 로스앤젤레스의 Azusa Street에 있는 Apostolic Faith Gospel Mission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단체의 지도자는 William Seymour 이라는 흑인 전도사였습니다. 그때부터 이 단체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교리를 계속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흥미 있게 보이도록 노력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이 오순절파 운동은 전통적인 백인 기독교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전세계에 걸쳐서 개신교와 천주교 안에 오순절파의 가르침을 믿는 수백만의 교인들이 있다.”(Compton’s Interactive Encyclopedia, under the entry “Pentecostals”)
무아경의 주문을 외우는 이방 종교의식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을 모방한 거짓 방언들은 이방 종교의 음악을 모방한 기독교회의 음악과 종교의식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비정규적인 리듬의 연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적인 능력을 잃게 만들고 최면적인 무아경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통하여 극렬한 상태로 반복되는 중얼거림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지금 사탄은 위조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트로이의 목마처럼, 이방 종교의 예배 방법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놀라울 만큼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탄은 기독교인들을 믿음에서 감정으로 이끌려고 합니다. 방언에 깊이 빠져 있는 어떤 교회들은 성경은 이미 지나간 구식이고, 방언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새롭게 주어진 기별이며, 심지어는 방언이 성경보다도 더 믿을 만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회 안에 사탄을 위한 무대가 이러한 단계까지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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