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4부,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의롭다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회는 예수께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은 제자들과 사도들의 교회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와 신앙의 기준은 처음 교회가 시작된 초대 교회이어야 합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 17:15)

성경은 악인을 의롭다고 하는 자는 “여호와께 미워하심을” 받는다고 선언합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abomination, 혐오스럽게 역겨운 것)을 입느니라”(잠 17:15). 이 말씀에 나오는 “미워하심, abominati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가장 강력한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악인을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큰 혐오와 미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 이 말씀은 마치 여호와께서는 악인을 의롭다고 하는 자를 미워하신다는 잠언서의 말씀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서와 잠언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또한 바울은 우리의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롬 3:28). 그런데 잠언서는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를 결코 의롭다고 하지 않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울과 잠언서 저자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상, 이 문제는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슈이며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셔야만 하는 이유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라면 우리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를 범한 악인일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므로 예를 들어서 살펴보겠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가족들이 처참하게 살해되어 있었습니다. 옆방에서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살인자가 피 묻은 손으로 막내 아이를 목 졸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단숨에 달려들어서 살인자를 땅바닥에 내던졌습니다. 얼마 후, 경찰이 와서 살인범을 체포했지만, 사랑하는 가족은 이미 죽었고 아버지의 인생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재판이 열리고 살인범의 죄를 증명하는 증거가 분명하게 제시되었습니다. 판사는 법정심리를 마친 후에 가족을 죽인 범죄자에게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나는 사랑의 재판관입니다. 나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온유하며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범죄자를 용서하고 석방하겠습니다. 나는 저 범죄자를 끝까지 사랑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재판관을 공정하고 의로운 판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법정에서 재판을 지켜보았던 방청객들이 재판관의 사랑을 칭송하면서 손뼉치고 흥겹게 노래한다면, 여러분은 그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정의를 실현하라!”고 외칠 것입니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고 신문사와 방송사를 찾아가서 “재판관이 가족을 죽인 살인범보다 더 사악한 자이다.”라고 탄원할 것입니다. 재판관은 철저하게 공의를 짓밟았으며 의로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무엇이 문제인가를 아시겠습니까? 재판관은 결코 죄를 범한 악인을 의롭다고 선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법과 검사와 배심원 그리고 재판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재판관에게 공의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공의를 행하는 분이시다”라고 말하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할까요? 교회에서 잘못 교육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상한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공의로우신 분이라면 그분께서는 결코 죄를 범한 악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서의 저자가 악인을 의롭다고 하는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 17:15).

대부분의 독자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런 복음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50년 전에는 복음을 잠언서의 저자처럼 설명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악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기독교회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며 거룩하고 죄를 미워하는 분입니다. 악을 의롭다고 선언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루스벨과 범죄 한 악한 천사들을 하늘에서 쫓아내셨으며,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죄를 보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에게 무죄를 선언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살인범에게 무죄를 선언한 사악한 재판관과 같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복음의 딜레마는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기 때문에 범죄자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설교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인간을 의롭다고 하시면서, 여전히 의로운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서 어떤 설교자들은 이렇게 설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공의로 대하실 수 있었지만 사랑의 하나님이 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덮어 주고 간과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한번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죄가 여러분의 구원과 영생을 무산시킬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설교가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불의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 죄를 덮어 버리고 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불의한 것으로 만드는 수많은 설교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미혹당하게 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 24:11). 가장 멋있게 들리는 미혹은 이런 설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그분의 의로우심과 공의를 뒤로 물리치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게 했습니다.” 얼마나 멋있게 들립니까? 그러나 이런 설교를 들을 때 마음속에 빨간색 경고등이 켜지지 않는 사람들은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의 딜레마를 풀어 주는 진리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공의로운 결정을 내리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의롭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시 97 : 1, 2). 하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명분하에 불의를 행하실 수 없으며 공의를 덮을 수 없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의로우심을 유지한 상태에서 악인을 의롭게 하실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는 오직 하나의 답이 있는데, 그것은 “화목제물”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화목제물”은 죄를 범한 죄인에게 있어서 너무나 절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이를 나눠 주고 “화목제물”의 정의를 써 보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확한 설명을 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다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인을 위한 변호사가 되는가를 밝혀 주는 말씀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상태에 있기 때문에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고 세상과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회는 오래전부터 복음과 진리에서 벗어난 상태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온 인류를 위한 “화목제물”로 들어올렸습니다. “화목제물”은 죄인을 대신하여 희생되는 제물입니다. 죄로 인해서 타락한 인류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와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죄를 범한 악인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공의도 충족케 됩니다. “화목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감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죄를 간과하시고 용서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십자가에서 모두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누가 화목제물이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희생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범죄 한 인류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범한 엄청난 죄를 짊어진 채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죽어야 하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소와 염소의 피로는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대속제물로 바쳐져야 할 존재는 하나님과 같은 신이어야 합니다. 왜 나무에 달려 죽는 희생제물이 육신을 입은 신이어야 할까요?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께로만 오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 2:9). 구원은 피조물로부터는 올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보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런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없는 피조물을 만드시고 그 피조물을 이 땅에 내려보내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죄를 해결했다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이 사실이라면 일개 피조물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를 구원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 가르침은 구원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무너뜨려서 “먼지” 속에 던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사도 요한은 그런 논리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우리의 구원자이며 메시아인 분은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런 성경절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이 말씀에서 “내가 있느니라”는 헬라어로 ego eimi인데 이것은 영어로 “I am”, 즉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다음 도표에서 보는 것처럼,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의 특징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특징과 정확하게 일치됩니다. 그리스도는 여호와십니다!

 

여호와의 특징

구약성경

신약성경

 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

 욜 2:32

 행 4:12; 10:43; 롬 10:13

 2. 여호와는 자기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시지 않음

 사 42:8; 48:11

 마 16:27

 3. 여호와는 창조주

 사 45:18

 골 1:16, 17

 4. 여호와는 구세주

 사 43:11; 44:6; 45:21, 22; 63:16

 행 4:12; 5:31

 5. 여호와 우리의 의

 렘 23:6

 롬 3:21~22; 10:9~10; 고후 5:21

 6. 여호와는 처음과 나중

 사 44:6

 계 1:8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또 하나의 이유

우리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내려오신 창조주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고 동등하신 분이지만 하늘 보좌를 버리고 “자기를 낮추”셔서 이 땅에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셨지만 신성의 영광과 특권을 하늘에 내려놓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못할 뿐 아니라 천사보다도 못한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히 2:7).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못할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였도다”(히 2:16, 킹제임스 성경). 하나님과 동등하고 거룩한 분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취하시고 오신 이유는 어떤 삶이 말씀과 계명이 순종하는 삶인지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팔복을 통해서 어떤 경험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

또한 인간이 받는 시험을 직접 받으심으로써 날마다 시험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인간을 “능히 도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의 모본이 되셔서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단지 죄를 대속하기 위한 목적만 있었다면, 잠시 갈보리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면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33년 반 동안의 삶을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사탄의 시험에 대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먼저 가신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7~18)

 

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는가?

십자가 나무에 달리신 분이 왜 하나님이셔야 합니까?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3~24).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부탁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고 했습니다. 나무에 달린 존재는 생명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나무에 달리는 일은 사람이나 천사가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죄를 정죄하는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피조물인 인류를 대속할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분은 누군가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어야 하므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대속의 희생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다리처럼, 사다리는 반드시 위쪽에도 닿아 있어야 하고 땅에도 닿아 있어야 합니다. 한쪽만 닿아 있는 사다리로는 위를 향해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한 손으로는 하늘을 붙잡고 계셨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구세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만이 중보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견디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늘이 태워지고 산들이 녹아내리며 강들이 말라 버린다고 했습니다. 최후의 심판날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뿌린 결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계 20:14). 이러한 하나님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떻게 몇 시간 동안 나무에 매달려 고통 속에서 죽었다고 해서 인류 전체가 범한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사람들을 지옥불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건 말도 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분은 몇 시간 동안 받은 고통으로 많은 사람을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류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고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이 충분하고 완전한 이유는 예수께서 죄 없는 어린양일 뿐 아니라 그분의 생명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는 창조주로서 대속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주의 생명을 측정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울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 저울의 한쪽에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올려놓고 다른 한쪽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올려놓는다면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까요? 저울 한쪽에 천천만만의 천사, 지금까지 지구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 온갖 종류의 동물과 식물 그리고 나방과 귀뚜라미 같은 벌레의 생명뿐 아니라 모든 행성과 별들, 산과 바다과 강과 흙을 올려놓는다고 할지라도 저울은 그리스도 쪽으로 기울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가치를 가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가치는 우주 안에 감히 비교할 만한 대상도 없으며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존귀함이 조금 느껴지십니까? 그런 분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피조물은 결코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

 

질문 또는 소감을 보내주세요

* 필수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