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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아마겟돈 전쟁을 위한 훈련학교

이미 언급한 것처럼, 아마겟돈이라는 단어의 뜻은 갈멜산입니다. 사도 요한은 왜 마지막 시대의 선과 악의 투쟁을 설명하면서 아마겟돈(갈멜산)을 인용했을까요? 왜냐하면 아마겟돈 전쟁은 갈멜산의 투쟁처럼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들과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투쟁하는 형태로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갈멜산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갈멜산에서 승리한 엘리야의 신앙과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야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로 준비될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해야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갈멜산 투쟁을 위한 준비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어느 날 갑자기 갈멜산 위에 데려다 놓고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시킨 것이 아닙니다. 갈멜산의 전쟁에 나서기까지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련의 훈련 과정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갈멜산에 보내기 전에 어떤 훈련을 시키셨을까요?

 

아마겟돈 전쟁을 위한 하나님의 훈련학교

 

1. 첫 번째 훈련: 순종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 17:1)

첫 번째 훈련은 아합 왕에게 가서 “수년 동안 우로(비와 이슬)가” 없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엘리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엘리야의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가?”라고 의아해합니다. 그의 능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입니다. 충성은 아무에게나 나오는 정신이 아닙니다. 회개한 자의 심령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는 예의있고 신실해 보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충성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무엇인가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회개일까요? 아닙니다. 회개는 말이 아니라 심령입니다. 기도의 심령을 받은 사람이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처럼, 회개도 죄에 지치고 시달려서 깊이 상한 심령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범한 죄가 정말 무엇인지 인식하게 되면 회개의 기도가 이런 식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주님, 제가 믿지 않는 자처럼 말했습니다. 제가 마치 천사들이 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주님, 제가 원수 사탄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얼굴을 다시 있을까요? 양심의 가책이 심장을 짓누릅니다. 주님, 마음이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주님의 인정하심을 다시 받을 있을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 영혼의 평안을 회복할 있을까요? 주님, 도와주세요.

 

성도 여러분, 내가 정말 어떤 ‘짓’을 했는지 알면 두려움과 가책과 고민 속에서 주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죄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죄를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받아주시옵소서. 저는 이제 죄의 고통을 이상 감당할 없습니다. 당신의 피로 영혼을 씻어주시옵소서. 당신의 보혈로 더러운 입을 닦아주시옵소서. 귀와 눈과 모든 것을 씻어주시옵소서. 영혼의 고통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저를 짓누르는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저를 건져주시옵소서.

 

온 마음을 다해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가슴속에서 평안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친 영혼을 감싸 안아주시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생명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소원과 충성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이고 그리스도의 의를 회복하는 경험입니다.

다시 엘리야의 경험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엘리야는 어떤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까? 엘리야의 머리로 이해되는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수년 동안 우로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고 땅에서도 이슬이 생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당시는 비가 풍부하게 내려서 매년 풍요로운 농사와 수확을 거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때에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고 이슬도 생기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수년 동안 비와 이슬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많은 시험을 받았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사시사철 흐르는 강물을 보았을 것입니다. 푸른 나무로 덮인 산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어떤 시험을 받았을까요? 이런 시험을 받았을 것입니다.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는 저 강물이 어떻게 마를 수 있을까? 어떻게 저 푸른 산과 계곡이 가뭄으로 타들어가게 될까?”

만일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엘리야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의 호위 부대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때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순종을 앞에 두고 손해와 이익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능력 있는 신앙의 비결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련학교 입학 조건 = 순종

때때로 힘겹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의 도전을 받게 될 때 어떤 유혹을 받습니까? 내 꾀와 내 인간적인 아이디어로 고난을 피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성령의 음성을 피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훈련학교에 입학할 수 없습니다. 순종하지 않기 위해서 핑계를 대고, 말씀을 피해 다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훈련시킬 수 있습니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아합 왕 앞에 보낼 수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훈련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고향 땅을 떠나면 얼마나 많은 이익이 생기는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훈련학교에 입학해서 훈련받다가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믿음까지 배우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위로 걸어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비록 물위를 걷다가 빠지고 실패했지만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즉시로 실패한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는 교훈을 배울 수 없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다가 실패할지라도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것이 알곡의 경험입니다.

알곡이라고 해서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지만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알곡입니다. 알곡과 가라지 모두 쓰러지고 실패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나 결과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알곡은 쓰러지면서 영글어가고, 가라지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속이 비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훈련학교에 입학하는 유일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마지막 시대 아마겟돈(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들과 투쟁해서 승리하려면 엘리야의 순종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02. 두 번째 훈련: 그릿 시냇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 17:2-4)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이런 명령을 받으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크게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만화영화 같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수년 동안 비와 이슬이 없어서 온 땅이 말라서 타들어갈 텐데, 지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약속해주신 것이 뭡니까? 아주 작은 시냇물과 유대지방에서 가장 작은 새 중의 하나인 까마귀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날마다 먹을 것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안해 보이는 약속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을 두 가지로 훈련시키시는데, 그것은 말라가는 시냇물과 까마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훈련학교에서 이 두 가지를 통해서 훈련받게 될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는 우로가 없으면 얼마 가지 않아서 말라버릴 작은 시내였습니다. 물이 콸콸 흐르는 시내가 아니었습니다. 나일강처럼 폭이 넓고 수량이 풍부한 강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갈멜산에 가기 전에 배운 경험입니다. 아주 불안해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전진하는 것, 그것이 엘리야가 배운 경험입니다.

 

시냇물이 말라갈 때 배우는 경험

하나님의 약속대로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날라왔고 시냇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시냇물이 말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시냇가에 나갔더니, 그릿 시내의 바닥의 돌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말라만 가는 시냇물을 보면서 엘리야의 믿음은 시련을 받았을까요? 그렇습니다. 내가 의지하던 시냇물이 마를 때 우리는 정말 강렬한 시험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물이 풍부한 곳을 찾아가고 싶은 유혹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 시냇물이 마르는 경험을 해보았습니까? 돈 쓸 곳은 많은데, 돈이 말라서 타들어가는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그것이 시냇물이 말라가는 경험입니다. 어떤 때는 몸이 아파서 일을 못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떤 경험입니까? 내가 의지하던 건강이라는 시냇물이 말라가는 경험입니다. 잘 나가던 자녀가 우울증이 생기고 성적이 떨어지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자녀가 직장을 잡지 못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무슨 경험입니까? 시냇물이 말라가는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의 삶 속에서 시냇물이 마르는 경험을 주실까요? 시냇물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냇물이 말라갈 때 엘리야의 믿음이 시련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명하신 그 장소에서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엘리야는 말라가는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조용히 기다리는 믿음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시련 속에서 조용히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아마겟돈으로 가는 훈련입니다.

 

문을 닫고 다른 문을 여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인도하신 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일까요? 엘리야가 하나님을 좀 더 깊이 만나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여러 다른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왕에게 재난의 기별을 주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조용한 그릿 시냇가에 숨기시고 날마다 까마귀로 먹이셨습니다. 얼마나 자상한 하나님입니까? 그런데 동일한 하나님께서 이제는 시냇물을 말리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만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냇물이 마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또 다른 경험을 주기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만일 시냇물이 마르지 않았다면, 엘리야는 그곳에 편안하게 안주하기 원했을 것입니다. 까마귀가 주는 것에 만족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어떤 때는 한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여십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방향을 바꾸고 움직이면서 새로운 경험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문을 닫고 다른 문을 여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의지하고 있던 시냇물이 마를 때마다,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쪽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여셔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그것이 우리에게는 시련과 고통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엘리야에게 일어났던 시냇물이 마르는 절망의 경험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볍고 형식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폭풍과 시련이 올 때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폭풍우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시냇물이 마르는 경험은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은 한 번에 배울 수 있는 경험이 아닙니다.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항상 나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배우는 데에는 여러 해가 걸릴 수도 있습니다.

 

3. 세 번째 훈련: 까마귀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 17:4)

하나님께서 까마귀로 엘리야를 먹이시겠다고 하는데 까마귀의 입이 큽니까? 작습니까? 매우 작습니다. 입이 작은 까마귀가 얼마나 많이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물고 올 수 있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한꺼번에 많이 나를 수 있는 독수리나 주둥이가 큰 펠리컨 같은 새를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왜 까마귀처럼 작은 새를 시켜서 먹을 것을 배달하게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먹이고 입히시는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약속하신 것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도 작은 시냇가와 까마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시냇물과 까마귀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적은 것에 자족할 줄 아는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자족하는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신 것을 감사하고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시대 성도의 신앙이고 행복의 비결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너무나 크고 높은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까마귀는 날마다 날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날마다 공급되는 것입니다. “Day by day, 하루하루”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공식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3년 반치 식량을 한꺼번에 주시지 않고 하루 단위로 공급해 주셨을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키워 나가기 위한 하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은 주께 맡기고 날마다 보내주시는 까마귀를 기다리면서 사는 것, 그것이 마지막 시대의 갈멜산으로 가는 길에서 배워야 할 경험입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작은 새들이 날기 어려운 날이 되면, 엘리야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엘리야는 도무지 까마귀가 올 수 없는 날씨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어떤 상황에서도 까마귀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작고 힘없는 까마귀를 통해서 엘리야를 먹이셨을까요? 왜냐하면 엘리야가 까마귀를 의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가 까마귀를 의지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여러분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까마귀를 기다리십니까? 아니면 까마귀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니까?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의 때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종들이 배워야 할 경험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까마귀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 좋은 것을 주시는데 어떤 때는 그것이 까마귀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얗고 예쁜 비둘기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믿음과 신뢰가 갈 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가끔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임할 때 검은색 까마귀처럼 보입니다. 어떤 때는 진리가 이단이라고 포장이 되어 나타나고 참 복음이 율법주의라는 소문을 달고 나타납니다. 어떤 때는 주께서 보내신 종인데 거짓 선지자라는 낙인이 찍혀서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사탄이 진리 위에 검은 보자기를 씌워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진리의 가치를 분별할까요? 내 생애 속에서 시냇물이 마르는 경험을 깊이 해본 사람들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보는 눈이 다르고 듣는 귀가 다릅니다. 말라가는 시냇가에서 고난을 맛본 사람은 소문과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판단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속에서 눈에 안약을 바르는 경험을 하는 성도들은 영을 분별하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성도 여러분,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으면 마지막 시대에 갈멜산에 가지 못하게 됩니다. 길을 잃어버리고 낙오하게 됩니다. 마지막 시대는 기만의 시대입니다. 충성이 배도로 취급되고 배도가 사랑으로 비추어지는 시대입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가지 상반된 경험

진리를 따라서 좁은 길을 걷는 성도들은 두 가지 상반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시냇물이 말라가는 것을 보고, 다른 쪽에서는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고 날아오는 것을 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내가 의지하고 있던 것이 말라가고, 다른 쪽에서는 까마귀에 의해서 필요가 채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고난이 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도우심이 찾아옵니다.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을 위한 하나님의 훈련 코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서 시냇물도 마르고 까마귀도 날아오지 않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시냇물이 말라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보내신 까마귀가 어디선가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외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번제로 드릴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시냇물이 마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앞에서 에서가 자신과 가족을 죽이기 위해서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야곱의 시냇물이 말라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부드럽게 변화시켜서 복수의 정신을 제거하는 역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노예 상인에게 팔려갔습니다. 주인 집에서 충성을 다했지만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갔습니다. 왜 요셉의 시냇물은 계속해서 말라만 갔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반드시 까마귀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요셉은 애굽의 최고 자리에 올랐습니다. 요셉은 상황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이 곧바른 진리를 선포하고 교회의 배도와 죄를 지적했을 때, 그들의 시냇물은 즉시로 말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단한 생애 속에서도 꾸준하게 까마귀를 보내주셨습니다. 시냇물은 바싹 말라갔지만 까마귀가 여전히 날아오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믿음을 배웠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까? 시냇물이 말라갈 때에는 어디선가 우리를 향하여 까마귀가 날아오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에게 용기를 주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어디선가 까마귀가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줍니다.

까마귀는 언제 날아오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까마귀가 날아오는 시간까지 스스로 정하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은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 다음 주 월요일까지 이 문제를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까마귀가 날아오는 시점과 타이밍은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시냇물이 바닥을 드러내며 완전히 마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까마귀가 날아오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전히 믿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로 준비될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짐승의 표 환난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짐승의 표 환난은 시냇물이 완전히 마르고 까마귀도 날아올 것 같지 않은 상황을 믿음으로 통과하는 환난입니다. 그런 환난을 통과해야만 마지막 갈멜산의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계 13:15-17)

 

알곡과 가라지

그릿 시냇물과 까마귀 이야기는 알곡과 가라지 이야기입니다. 시냇물이 소리를 내면서 흐를 때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찬양하면서 믿음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시냇물이 말라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금방 조급해져서 안절부절못하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냅니다. 왜 이런 증세가 나타날까요? 왜냐하면 아직 갈멜산에 올라갈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까마귀가 눈에 보여야만 믿음이 유지되는 사람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하나님의 편에 서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은 시냇물이 마르는 시련을 통과하면서 잘 익은 알곡으로 익어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똑같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불평과 원망을 토해내는 가라지로 변하게 됩니다. 똑같은 경험을 통과하면서 어떤 사람은 알곡으로 익어가고 어떤 사람은 가라지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저편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통 저편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전진할 것을 기대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련과 환난에 압도되어 불평과 원망을 토해내는 가라지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전진하는 거룩한 습관을 익혀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을 나누는 선이 될 것입니다.

 

4. 네 번째 훈련: 사르밧 과부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왕상 17:8-9)

그릿 시냇물이 완전히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시돈은 이세벨의 고향이었고 이세벨의 일가친척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시돈에 있는 사르밧”은 이세벨을 지지하는 중심 세력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의 고향에서 놀라운 복음을 전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전한 기별은 무엇입니까?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왕상 17:13).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네가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가? 정말 믿는다면, 네가 죽기 전에 먹으려고 남겨 놓은 마지막 한 웅큼의 밀가루와 기름을 나에게 달라.”는 기별을 전했습니다.

엘리야가 전한 복음은 메마른 가르침이나 죽은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냇물이 바짝 마르고 타들어가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까마귀가 날아온다는 살아있는 복음이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뜻은 이루어지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기별이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순종하면 살 수 있다는 기별이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주께서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는 기별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말라가는 시냇가와 까마귀 훈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훈련학교를 통과했기 때문에 살아있는 믿음을 전할 수 있는 기별자로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받았던 훈련을 우리도 무사히 마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마겟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대표자가 되서 사탄의 “세 더러운 영”과 싸우게 될 것입니다. 거짓 이적과 귀신의 미혹을 압도하는 능력으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계 16:13-14)

 

말라버린 시냇가와 까마귀로 훈련받은 성도의 믿음 앞에서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엄청난 이적도 하찮은 마귀의 장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백성은 이적이나 감정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성도의 특징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신앙입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의인과 악인의 마지막 운명

구약시대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었고, 거짓 선지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와 동일한 역사가 마지막 때에도 반복됩니다. 마지막 시대의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하나님의 종들은 승리를 거둘 것이며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과 악인들은 모두 멸망당하게 됩니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계 19:20)

 

엘리야가 승리하고 하늘로 승천했던 것처럼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한 하나님의 백성도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 하늘로 승천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진주문 앞에서 첫 번째 엘리야가 나와서 두 번째 엘리야와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들을 뜨겁게 맞이해줄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런 장면입니까? 우리 모두 그곳에 함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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