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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수업

 편집장이 매주 독자들과 직접 만나서 예배드리고 성경을 연구하는 오프라인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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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수업 – 예수께 가는 길

1. 헌신-1

 1. 헌신-1

Number Title Author Date Votes Views
23
23. 회개-4
admin | 2017.07.13 | Votes 0 | Views 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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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2. 회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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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1. 회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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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 회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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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9. 그리스도께 이르기까지 자라남-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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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8. 그리스도께 이르기까지 자라남-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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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7. 그리스도께 이르기까지 자라남-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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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6. 그리스도께 이르기까지 자라남-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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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5. 그리스도께 이르기까지 자라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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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4. 그리스도께 이르기까지 자라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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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3. 그리스도께 이르기까지 자라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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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 제자 되는 증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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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 제자 되는 증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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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 제자 되는 증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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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 제자 되는 증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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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 제자되는 증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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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 믿음과 받으심-3 / 제자되는 증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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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 믿음과 받으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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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 믿음과 받으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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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 헌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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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헌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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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헌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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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헌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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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 가는 길”은 라디오 <변화>에서 낭독한 책 이름입니다. “예수께 가는 길”을 읽으면서 함께 의미와 경험을 공부합니다.

3장 - 회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옳은 자가 될 수 있을까?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을까?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거룩함에 조화(調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것인가? 많은 사람은 오순절 날에 허다한 무리가 죄를 깨닫고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고 질문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의 첫마디는 “회개하라”(행 2:38)는 것이었다. 그런지 얼마 후에 그는 말하기를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고 하였다.
회개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요,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회개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많은 사람은 저희의 악행이 저희 자신에게 고통을 미치게 할까 두려워 저희가 범죄한 것을 후회하고 혹은 외모적 변화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상 의미로서는 회개가 아니다. 저들은 죄 그것보다도 그 고통을 슬퍼함이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영구히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슬퍼한 것이 그런 것이다. 발람은 칼을 빼어들고 자기의 가는 길에 선 천사를 보고 두려워서 자기 생명을 잃을까 염려하여 자기 죄를 자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고 목적을 변하지도 않았고 악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가룟 유다도 자기의 주를 판 후에 부르짖기를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고 하였다.
이 고백은 정죄에 대한 무서운 생각과 심판에 대한 두려운 공포로 말미암아 그의 범죄한 심령에서 어찌할 수 없이 나온 것이다. 그에게 임할 결과가 그에게 공포심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팔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배반한 사실에 대하여 충심으로 마음을 찢는 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바로가 하나님의 형벌로 재앙을 당할 때에 형벌을 더 받지 않기 위하여 자기 죄를 자복하였으나 그 재앙이 그치자마자 다시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이것들은 다 죄의 결과를 두려워한 것 뿐이요 죄 그것을 슬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신의 감화에 순복할 때에는 양심이 각성되어 죄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신성한 율법의 깊은 뜻과 신성성을 얼마만큼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요 1:9) 심령의 구석구석을 비추어 암흑 가운데 감추인 것들이 드러나게 된다. 죄에 대한 자각은 마음과 뜻을 붙들게 된다. 죄인은 여호와의 의를 깨닫고 자기 자신의 죄악과 불결함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 속을 살피는 자 앞에 나아가기를 두려워하게 된다. 죄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신성함의 미(美)와 순결의 기쁨을 깨닫고 자기가 정결케 되어 하늘과 교통할 수 있게 되기를 사모하게 된다.
다윗이 범죄한 후에 한 기도는 죄에 대하여 참으로 슬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회개는 참되고 마음 속 깊은 데서 나온 것이었다. 죄를 변명하려는 노력도 없었고 정하신 형벌을 피하려는 욕망도 그 기도의 동기가 되지 않았다. 다윗은 자기의 범죄가 얼마나 흉악함을 깨달았고 또 자기의 심령이 얼마나 더러워진 것을 깨달아 자기 죄를 미워하였다. 그가 기도한 것은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서만 아니라 마음의 순결을 얻기 위하여서였다. 그는 성결의 기쁨 -즉 하나님과의 융화와 교통을 회복하는 것-을 갈망하였다. 그의 심경에서 나온 말은 이러하였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시 51:1-14).
이러한 회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승천하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얻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실패하여 그리스도께서 저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 저들은 먼저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회개는 저희 죄의 사유를 받게 하는 준비라고 생각한다. 물론 회개가 죄의 사유보다 먼저 있을 것은 사실이나 이는 구주의 필요성은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자만이 느끼는 까닭이다. 그러나 죄인이 예수께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그가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인가? 회개가 죄인과 구주 사이의 한 장애물이 되어야 할 것인가?
성경은 죄인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응하려면 먼저 회개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지 아니한다. 진정한 회개를 하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은덕이다. 베드로는 다음에 기록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한 그의 말 가운데서 이상의 말의 뜻을 밝히 드러냈다. 이스라엘로 회개하게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죄 사유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이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옳은 동기의 근원이 되신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 마음 가운데 죄에 대한 증오심을 넣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진리와 순결에 대한 모든 욕망-우리 죄에 대한 모든 감각-은 그리스도의 신이 우리의 마음에서 활동하시는 증거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위하여 죽으신 구주이심을 죄인에게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갈바리”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셨나니 죄인이 이 사랑을 주목할 때에 이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킨다.
사람이 혹시 저희가 그리스도께로 이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전에라도 저희의 죄악적 행실을 부끄러워하여 어떤 악습들을 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진정한 욕망으로 저희 생애를 개선하려고 힘쓰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저들을 이끄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능력인 것이다. 저들이 알지 못하는 한 감화력이 저들의 심령에 작용하여 양심이 각성되고 외부적 생애가 개선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저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쳐다보고 저희 죄 때문에 못 박히신 자를 주목하게 하실 때에 저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저희 생애의 악함과 저의 심령에 깊이 뿌리 박힌 죄가 저희에게 밝히 드러나게 된다. 저희는 그리스도의 의를 얼마만큼 이해하기를 시작하고 부르짖기를 “죄가 무엇이관대 죄를 범한 자를 구속하기에 그처럼 큰 희생이 요구되는가? 우리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사랑, 이 모든 고난, 이 모든 굴욕이 요구되었는가?” 할 것이다.
죄인이 이 사랑을 배척할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께로 끌려가기를 거절할 수도 있을 것이나 만일 죄인이 거절만 하지 않으면 그는 예수에게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구원이 경륜에 대한 지식은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고난을 당하게 한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동시에 십자가의 밑으로 이끌리게 할 것이다.
천연계의 사물에 작용하시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은 또한 사람의 마음에 속삭이어 사람이 가지지 못한 무엇을 찾고자 하는 말할 수 없는 갈망을 생기게 한다. 이 세상 사물은 저희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신은 저희로 하여금 평강과 안식을 줄 수 있는 것들 -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결의 기쁨-을 찾도록 인도하신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보이는 감화력과 보이지 않는 감화력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아무 만족을 주지 못하는 죄악적 쾌락에서 저들이 당신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축복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간단없이 일하신다. 이 세상에 터진 웅덩이에서 마시려고 헛되이 애쓰는 이런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기별은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는 것이다.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무엇을 갈망하는 그대들이여, 이 갈망이야말로 그대들의 심령에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라.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며 또한 그대들에게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완전한 순결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를 구하라. 구세주의 생애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한 사랑-이 완전히 실천되었다 사욕이 없는 사랑과 자선은 그의 심령의 생명이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의 악한 것을 깨닫게 되는 때는 우리가 구주를 쳐다볼 때 즉 구주께로부터 빛이 우리에게 이를 때이다.
우리는 혹 니고데모와 같이 우리의 생애는 정직하였고 우리의 도덕적 품성은 바르다고 자만하였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우리는 보통 죄인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겸비할 필요가 없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빛이 우리의 심령을 비출 때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생애의 모든 행실을 더럽게 한 우리 동기(動機)의 이기적인 것과 하나님께 대하여 가진 적의(敵意)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더러운 죄에서 깨끗이 씻어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이 형상대로 화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과 그리스도의 순결의 빛은 심령을 꿰뚫어 모든 오점(汚點)을 밝히 드러내고 사람의 품성의 결함과 결점을 폭로한다. 또 이 빛은 신성치 못한 욕망과 심지의 불신실과 입술의 불순결함을 명백히 드러낸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함으로 하나님께 불충성한 죄인의 행실이 자신의 눈앞에 드러나게 되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신의 감찰하시는 감화를 받아 찔림을 받고 통회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흠없는 품성을 볼 때에 자기 자신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이다.
선지자 다니엘이 자기에게 보냄을 받은 하늘 사자를 두른 그 영광을 보았을 때에 그는 그 자신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깨닫고 혼도(昏倒)되었다. 그는 그 기이한 광경을 봄으로 받은 바 영향을 말하기를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단 10:8)고 하였다. 이렇게 감동을 받은 사람은 그의 이기심을 미워하고 그 자애(自愛)의 정신을 가증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품성과 일치되는 마음의 순결을 구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의 의로는(외부적 행위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빌 3:6)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율법의 신령적 성질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외부적 생애에 적용하는 것처럼 율법의 문자대로만 판단한다면 그는 죄에게 멀었다. 그러나 그가 신성한 율법의 깊은 뜻을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자신을 볼 때에 그는 스스로 겸비하여져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라고 하였다. 그가 율법의 신령적 성질을 깨달을 때에 죄는 참으로 흉악하게 보이고 그의 자존심은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동등하게 여기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평가할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때에도 죄의 등급이 있다. 사람의 눈에는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악행이라도 하나님의 안목으로는 작은 죄가 아니다. 사람의 판단은 불공평하고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실상 그대로 헤아리신다. 술부대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그 죄가 그를 천국에서 제외(除外)한다는 말을 듣는다. 동시에 교만과 이기심과 탐욕은 오히려 아무 책망도 받지 않고 지나쳐 버려지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이런 죄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특히 미워하시는 바니 대개 이런 죄가 하나님의 품성의 인자와 반대될 뿐 아니라 타락지 않은 우주의 분위기가 되는 사욕없는 사랑과도 반대되는 연고이다. 이보다 더 큰 죄에 빠지는 자는 오히려 자기의 수치와 부족을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교만은 아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교만은 마음문을 닫고 그리스도를 영접지 아니하고 그가 가지고 오신 무한한 축복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하고 기도한 가련한 세리는 자신을 심히 큰 죄인으로 보았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필요를 느끼고 그의 죄와 수치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다. 그의 마음 문은 열려서 하나님의 신이 그 은혜로우신 역사를 할 수 있게 되고 그를 죄의 권세에게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바리새교인의 교만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기도는 그의 마음이 성신의 감화를 막았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그는 하나님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완전함과 비교하여 그 자신이 더러운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도움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으매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다.
그대가 자신의 악함을 깨달으면 스스로 개선하기를 지체하지 말라. 그리스도께로 나아갈만큼 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노력으로써 선하게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우리를 돕는 도움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우리는 누가 좀 더 힘있게 권고해 주기를 기다리지도 말 것이고 좀 더 좋은 기회나 좀 더 좋은 기분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그저 그대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아무든지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자비가 크시므로 그의 은혜를 저버린 자라도 구원하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속지 말라. 죄가 심히 악하다는 사실은 다만 십자가에 비추어서만 헤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너무 선하셔서 죄인을 버리시지 않으신다고 사람들이 주장할 때에 저들로 하여금 갈바리를 쳐다보게 하라. 그리스도께서 불순종한 인류의 죄를 걸머지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은 사람을 구원할 별다른 방법이 없는 까닭이요, 또한 이 희생이 없이는 인류는 죄의 더럽히는 권세에서 벗어나서 거룩한 자들로 더불어 교제를 회복하기 불가능-인류가 다시 영적 생애를 할 수 있는 자가 되기 불가능한-까닭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과 고난과 사망은 다 죄의 무서운 흉악성을 증거하는 동시에 사람이 그 마음을 그리스도께 바치지 않고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더욱 고상한 생애를 살 소망도 없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라고 하는 자들을 들어서 말하기를 “나도 저들만큼 선하다. 저들은 저희 행실에 있어서 나보다 별로 더 극기하고 단정하고 근신하지 못하다. 저들도 나처럼 오락과 방종을 좋아한다.”는 말로써 저희 자신을 변명하는 때가 있다. 이와 같이 저들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가지고 저희의 할 의무를 등한히 한 것에 대한 핑계를 삼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이 아무 사람의 핑계도 될 수 없나니 대개 주께서는 허물이 많은 인간을 우리의 모본으로 주시지 않으셨음이다.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의 모본으로 주셨으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악한 소행을 비평하는 자들은 더욱 착한 생애와 더욱 고상한 모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만일 저들이 그리스도인의 자격에 대하여 그처럼 고상한 개념을 가졌을 것 같으면 그만큼 저희 죄가 더 크지 아니한가? 이는 저희가 어떤 것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그대로 행치 아니한 연고이다.
지체하는 일을 삼가라. 그대의 죄를 버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마음의 순결을 얻는 일을 지체하지 말라. 여러 천만 사람이 이 점에 실패를 하여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다. 나는 사람의 생명이 짧고 덧없음에 대하여 여러 말을 않거니와 하나님의 성신의 애소(哀訴)하는 소리에 순종하기를 지체하고 죄의 생애를 살기로 택하는 일은 두려운 위험-우리가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위험-이니 과연 이러한 지체는 사실상 매우 위험한 것이다. 죄는 아무리 작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그냥 범하는 때에는 무한한 손실을 받게 될 것을 각오(覺悟)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우리를 극복하고 우리를 멸망케 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는 과실을 먹는 그러한 작은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바와 같은 그러한 무서운 결과가 생길 리는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작은 일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거룩한 율법을 범한 것이 또 그것이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고 이 세상에 사망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재난의 방축문(防築門)을 연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시대를 내려오면서 이 땅에서는 비탄의 부르짖음이 그치지 아니하고 창조함을 받은 만물이 인류의 불순종의 결과로 인하여 함께 탄식하고 괴로움을 받고 있다. 하늘 자체도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한 그 영향을 받았다. 갈바리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를 속하기에 요구되는 놀라운 희생의 기념물로 서 있다. 우리는 죄를 심상한 것으로 여기지 말자
죄를 범하는 행동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멸시하고 저버리는 것마다, 그 영향은 그대들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또 그것이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의지를 약하게 하고 지각을 마비시켜 그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신의 간절한 탄원에 응할 생각을 적어지게 할 뿐 아니라 능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저희는 아무 때나 원하는 때에 저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설 수 있다는 생각으로 또는 저희가 지금 하나님의 자비의 초청을 경솔히 여길지라도 일후에 감화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저희의 불안한 양심을 진정시키고 있다. 저들은 생각하기를 은혜의 성신을 거스린 이후에라도 또는 저희의 감화를 사단의 편으로 끼친 이후에라도 어떤 최후적 순간에 저희가 걸어오던 방향을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일생동안의 경험과 교육이 이미 그 품성을 완전히 형성하였은즉 그 때에 가서 예수의 형상을 받고자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비록 품성 가운데 한 가지의 못된 성벽이나 한 가지 악한 욕망이라도 고집스럽게 품고 버리지 않으면 결국에는 복음의 모든 능력을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죄악적 방종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정신을 강하게 한다. 대담하게 불신의 정신을 나타내는 자,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전연 무관심하는 자는 그 자신이 심은 바의 수확을 거둘 뿐이다. 온 성경을 통하여 죄인은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니”(잠 5:22)라는 솔로몬의 말보다 악을 심상하게 보는 데 대한 더 두려운 경고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 의사를 강제하시지는 않으시나니 만일 우리의 의사가 죄를 범하기를 고집함으로써 온전히 악에 쏠리게 되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아니하거나 혹은 우리가 그의 은혜를 받을 의사가 없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더할 수 있으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고히 배척하므로 자멸하는 것이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 3:7, 8).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여호와는 기쁨과 슬픔의 착잡(錯雜)한 감정으로 찬 사람의 마음, 더러운 것과 거짓의 거처가 되는 방황하고 제멋대로 나가는 사람의 마음 속을 보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동기와 의사와 목적을 아신다. 그대는 더럽힌 그대로의 심정을 가지고 그에게로 나아가라. 시편 기자와 같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자 앞에 그 마음문을 열어놓고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시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 24)하고 부르짖으라.
많은 사람은 마음은 깨끗이 씻지 아니하고 지적신앙(知的信仰) 곧 형식적 경건만을 받아들인다. 그대들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할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영혼을 진실되게 취급하라. 그대들의 육신적 생명이 위기에 처하여 있는 것처럼 열심히 또는 꾸준히 행하라. 이 일은 하나님과 그대들 개인 사이에 영원히 결정하여야 할 문제이다. 추상적 소망은 결국 그대를 멸망에 이르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거룩함의 큰 원칙을 그대들에게 밝히 보여 주나니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이 말씀은 죄를 깨닫게 하고 구원의 길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준다. 이 말씀을 그대들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유의(留意)하라.
그대들의 죄의 흉악한 것을 볼 때에 또는 그대들이 자신의 진상(眞相)을 볼 때에 실망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와 화목시킬 것이 아니다. 그 놀라운 사랑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고후 5:19)하셨다. 그는 당신의 부드러운 사랑으로써 죄에 빠진 당신의 자녀의 마음을 사려고 하신다. 세상의 부모라도 저희의 자녀들의 허물과 잘못에 대하여 참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이 구원하려고 하시는 자들에 대하여 참으시는 것처럼 그렇게 오래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죄인에게 그보다 더 인정 있게 애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입술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보다 더 인정 있는 간청이 새어 나온 적이 없다. 그의 모든 허락과 경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표시이다.
사단이 그대에게 와서 너는 큰 죄인이라 하거든 그대는 그대의 구주를 쳐다보고 그의 공로에 대하여 말하라.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은 곧 그의 빛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대의 죄를 자복하라. 그러나 원수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 1:15)는 것과 또 그대가 구원을 받는 것은 그의 비할 데 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라고 하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두 빚진 자에 대하여 질문하셨다. 한 사람은 그 주인에게 적은 금액의 빚을 지고 다른 사람은 매우 많은 금액의 빚을 졌는데 주인이 둘 다 탕감하여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시몬에게 묻기를 어느 사람이 그 주인을 더 사랑할 것이냐 하셨다. 시몬이 대답하기를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눅 7:43)하였다. 과연 우리는 큰 죄인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유함을 받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의 희생의 공로는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드리기에 넉넉하였다. 많이 사유함을 받은 자는 그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며 그의 크신 사랑과 무한한 희생에 대하여 그의 보좌 곁에 가장 가까이 서서 그를 찬송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죄의 악한 것을 가장 절실히 깨닫게 되는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충분히 이해하는 그 때이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리운 줄의 길이를 볼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그 무한한 희생을 얼마만큼 깨달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움과 통회로 녹아지는 것이다.

5장 - 헌신

하나님의 허락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고 하셨다.
온 마음을 반드시 하나님께 바쳐야 하나니 만일 그렇게 아니하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그 변화가 우리에게서 결코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 성신은 우리의 형편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진술하였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 2:1),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여…성한 곳이 없”(사 1:5, 6)다. 우리는 사단의 올무에 단단히 붙들어 매인 바 되어 “그 뜻을 좇아 그에게 사로잡힌 자”(옛 번역)(딤후 2:26)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쳐 주시고 놓이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는 전적 변화 즉 우리 온 성질의 갱신이 요구되는 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자신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은 일찍이 싸운 싸움 중 가장 큰 싸움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며 자신을 바치는 일은 고투(苦鬪)가 요구된다. 그러나 심령이 새로워져서 성결케 되려면 그 심령은 하나님께 순복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정부는 사단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맹목적 굴종이나 무리한 제재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부는 이지(理智)와 양심에 호소한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함은 조물주께서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에게 하신 초청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의 의사를 강제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단 마음과 이성적으로 하지 않는 경배는 받으실 수 없다. 다만 억지로 굴종하는 것은 마음과 품성의 진정한 계발을 방해할 것이요 사람으로 한갖 자동인형(自動人形)이 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조물주의 뜻이 아니다. 그는 당신의 창조력의 극치(極致)인 사람이 가능한 최고 한도까지 발달되기를 원하시는 최고의 축복을 우리 앞에 놓으셨다. 그는 당신의 뜻을 우리 안에서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당신께 바치기를 청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죄의 속박에서 놓이고 못놓이게 되는 것은 우리 선택에 달렸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그에게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은 일체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구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하셨다.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야 한다. 재물의 신(神)은 많은 사람의 우상이다. 돈을 사랑하고 재물을 탐하는 것은 저들을 사단에게로 붙들어 매는 금사슬이다. 명망과 세속적 명예는 또 다른 사람들의 숭배하는 바 된다. 이기적 안락의 생애와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의 우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예적 속박은 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반은 주의 것이 되고 반은 세상 것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 하고 옳은 품성을 닦아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달음으로 감동되지 못하고 다만 저들은 천국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서 이행하려고 한다. 이러한 신앙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거하실 때에 심령은 그의 사랑과 그와 더불어 교통하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어 그를 그리워서 따르게 될 것이다. 그를 명상하는 가운데 자신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자들은 하나님의 요구를 응하기 위하여 최소한도 얼마를 바쳐야 할는지를 묻지 아니하며 또한 가장 낮은 표준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저희의 구속자의 뜻에 완전히 일치되기를 목적할 것이다. 저들은 열심으로 모든 것을 바치고 저희가 바라는 바 목적물의 가치에 상당한 흥미를 나타낼 것이다. 이러한 깊은 사랑이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하는 것은 한갓 말뿐이요 건조 무미한 형식과 힘든 고역(苦役)일 뿐이다.
그대들은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너무 큰 희생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셨는가?” 스스로 자문하여 보라.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모든 것 -생명과 사랑과 고난-을 주셨다. 그런즉 그처럼 큰 사랑을 받을 아무 가치도 없는 우리가 어찌 우리의 마음을 그에게 바치기를 아낄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생애의 순간마다 우리는 그의 은혜의 축복을 받아온 자이다. 이 까닭을 인하여 우리는 얼마나 무지하고 불행한 가운데서 구원함을 받았는지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찔림을 받은 그를 바라보면서도 그의 모든 사랑과 희생을 멸시하는 행동을 즐겨 행할 것인가? 영광의 주께서 받으신 한없는 굴욕을 생각할 때에 분투와 자아 겸비를 함으로써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서 우리가 어찌 원망할 것인가?
많은 교만한 자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신다는 확실한 보증도 받지 못하고 어찌 내가 참회하고 굴복하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그리스도를 보라. 그는 죄가 없으셨을 뿐 아니라 하늘나라의 왕자이셨다. 그러나 그는 인류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바 되셨다.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그러면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린다고 하는 그 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곧 죄가 더러워진 마음이니 이것을 예수의 피로 깨끗이 씻어 순결케 하여 그의 비할 데 없는 사랑으로써 구원하는 바 되기 위하여 그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러하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기를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러한 말을 듣기를 부끄러워하고 기록하기도 부끄러워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어서 가장 유익할 것은 아무 것도 버리기를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는 당신의 자녀들의 행복을 염두에 두신다. 그리스도를 믿기로 택하지 아니한 모든 사람들은 저희 자신이 구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을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 주시려고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노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서 어그러진 생각과 행동을 할 때에 그는 자기 심령에 가장 큰 손상과 억울함을 끼치는 것이다. 무엇이 가장 좋은 것임을 아시고 당신의 피조물의 유익을 위하여 경륜하신 자가 금(禁)하시는 길에서는 참된 기쁨을 찾을 수 없다. 죄악의 길은 불행과 멸망의 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시고 좋아하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온 하늘은 인류의 행복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천부께서는 당신의 어떤 피조물에게든지 즐거움의 길을 막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고난과 실망을 가져오고 행복과 하늘의 문을 우리에게서 닫아 버리는 그러한 방종을 피하라는 것이다. 구주께서는 사람을 저희의 모든 부족과 불완전함과 연약한 그대로 받으신다. 그리고 그는 저들을 죄에서 깨끗이 씻고 당신의 피로써 구속하실 뿐 아니라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의 짐을 지기를 결심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의 소원을 채워 주신다. 생명의 양식을 얻으려고 당신에게로 나오는 모든 자에게 평안과 안식을 주시는 것이 그의 뜻이시다. 그는 불순종하는 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행복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그러한 의무만을 이행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참된 심령의 즐거운 생애는 영광의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형성(形成)하는 그것이다.
많은 사람은 “내가 어떻게 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것인가?”하고 묻는다. 그대들은 그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나 도덕적 힘이 약해서 유혹의 종이 되고 죄악적 생애의 숩관에 지배를 받고 있다. 그대들의 약속과 결심은 썩은 새끼와 같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생각과 동기와 애정을 억제할 수 없다. 그대들이 약속을 어긴 것과 맹세한 것을 이행치 못해 온 사실을 깨달을 때에 그것이 그대 자신의 성실성에 대한 그대들의 신임을 약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받으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그대들은 낙심할 필요는 없다. 그대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곧 의지의 참 힘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력이요, 결정력이요, 선택력이다. 만사는 의지를 옳게 쓰는 여부에 달렸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셨으니 그대들은 이것을 사용할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마음을 고칠 수 없고 그대 자신으로는 애정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나니 그리하면 그는 그대들 안에서 그대들의 원하고 행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의 온 성질은 그리스도의 신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대들의 애정은 그에게 중심을 두게 되고 그대들의 사상은 그와 조화될 것이다.
선과 성결에 대한 욕망은 좋기는 좋으나 만일 그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희망하고 소원만 하다가 멸망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저들은 저희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다. 저들은 지금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결정하지 않는다.
의지를 옳게 사용함으로써 그대들의 생애에는 전적 변화가 생기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바침으로써 그대들은 정사와 권세를 초월한 능력으로 더불어 연결되는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을 굳게 서게 할 힘을 위로부터 얻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끊임없이 바침으로 말미암아 새 생애 곧 믿음의 생애를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6장 - 믿음과 받으심

그대들의 양심이 성신으로 말미암아 각성될 때에, 그대들이 죄의 악함과 죄의 세력과 범죄와 죄의 쓰라림이 무엇임을 얼마만큼 깨닫게 될 때에는 죄를 매우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은 죄가 그대들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한 것과 그대들이 죄의 세력에 얽매인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대들이 그 세력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대의 무력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동기는 불순하고 그대들의 마음은 깨끗하지 못하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생애가 사욕과 죄로 차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대들은 사유함을 받아 깨끗하여지고 죄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할 것이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융화하고 그와같이 변화하는 것-이것을 어떻게 함으로 얻을 수 있는가?
그대들이 요구하는 바는 평안 곧 마음 가운데 하늘이 사유와 안정과 사랑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없고 지력으로도 얻을 수 없고 지혜로도 구할 수 없나니 그대 자신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도무지 얻기를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돈 없이 값없이”(사 55:1) 한 선물로 제공하신다. 만일 그대들이 손을 내밀어 붙잡기만 하면 그것은 그대들의 것이 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겔 36:26)이라고 하셨다.
그대들이 죄를 자복하고 충심으로 그것을 버린다고 하자. 또 그대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였다고 하자.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가 그대의 죄를 씻어 버리시고 그대에게 새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라. 그리고 그가 허락하셨으니 그렇게 하실 것을 믿으라. 이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가르치신 교훈이니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은 우리가 받은 줄로 믿어야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권능을 믿을 때에 저들의 질병을 고쳐 주셨다. 그는 저들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에 도와주셨나니 그렇게 함으로써 저들로 하여금 눈으로 볼 수 없는 일에 있어서도 그를 신임할 수 있게 즉, 저들로 하여금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당신의 권능을 믿게 하셨다. 이 사실은 그가 반신 불수를 고치실 때에 명백히 진술되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 9:6). 이와같이 복음 전도자 요한도 그리스도의 이적에 대하여 말하기를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고 하였다.
예수께서 병을 어떻게 고치셨다는 간단한 성경 기사로써 우리는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 그를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베데스다의 반신 불수의 이야기를 회상해 보자. 이 불쌍한 병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38년간이나 수족을 쓰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명하셨다. 그 병자는 “주여 당신이 만일 나를 낫게 하여 주시면 내가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겠나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아니하고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으니 곧 나은 줄로 인정하고 즉시 힘을 써서 걸으려고 하였으니 걷게 되었다. 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셨다. 그는 그 병이 나았다.
이와 같은 모양으로 그대들도 죄인이다. 스스로는 과거의 죄를 속할 수도 없고 자기의 마음을 고칠 수도 없고 자신을 성결케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을 그대들을 위하여 행하시겠다고 허락하셨다. 그대들은 그 허락을 믿고 자복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를 섬기기로 결심하라. 그대들이 이렇게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당신의 말씀을 이행하실 것이다. 그대들이 허락을 믿을 것 같으면 -그대들이 사유함을 받고 깨끗이 씻음을 받은 줄로 믿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사 그대들도 마치 반신 불수가 고침을 받은 줄로 믿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걸을 능력을 주신 것처럼 고침을 받는 것이다. 그대들이 믿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대들이 고침을 받은 것을 느낄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고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렇게 되는 것은 내가 느끼기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고 하셨다. 이 허락에는 조건이 있나니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죄에서 깨끗이 씻어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로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축복들을 구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받은 줄로 믿고 받았으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예수께로 나아가 깨끗이 씻음을 받고 부끄러움이나 후회가 없이 율법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롬 8:1, 4)는 연고이다.
그 후로는 그대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너희가…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 19). 하나님을 믿는 이 단순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성신께서는 그대들의 마음 속에 새 생명을 나게 하신 것이다. 그대들은 하나님의 가족 가운데 한 어린 아이로 출생되었나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대들을 사랑하실 것이다.
이제 그대들이 그대들 자신을 예수께 바쳤은즉 다시 돌아서지도 말고 그에게서 떠나지도 말고 오직 날마다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그에게 바쳤다”고 하라. 그리고 그에게 당신의 신을 주시기를 구하고 또 당신의 은혜로 그대를 보존하여 주시기를 청할 것이다. 그대들이 그의 자녀가 되는 것도 그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처럼 그대들이 그의 안에서 사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은 모양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골 2:6)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저희는 아직 미결(未決) 중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요구하려면 먼저 저희가 개선되었다는 것을 주께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저들은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요구할 수 있다. 저들은 저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신을 받아야 하나니 그렇지 않으면 악을 능히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죄많고 무력하고 도움이 요구되는 그러한 상태 그대로 당신께 나오는 것을 좋아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죄가 많은 그대로 나아가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의 발아래 엎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사랑의 팔로 우리를 안으시고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고 우리에게서 모든 누추한 것을 깨끗이 씻어 주시는 일은 그의 영광으로 여기시는 바이다.
많은 사람은 여기에서 실패하나니 즉, 저들은 예수께서 저희를 직접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지 아니한다. 그리고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믿지 아니한다. 조건대로 응하는 모든 자들이 저희 죄 전부가 관대히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저희의 특권이다. 하나님의 허락은 그대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버리라. 그 허락은 모든 회개하는 범죄자를 위한 것이다. 힘과 은혜는 봉사하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분급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준비되었다. 아무리 죄가 많은 자라도 저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안에서 힘과 순결과 의를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저들에게서 죄로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 의의 흰 두루마기를 입혀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그는 저들에게 살고 죽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유한(有限)한 사람이 피차 대우하는 것처럼 우리를 대접하지 않으신다. 그의 생각은 자비와 사랑과 지극한 긍휼의 생각이시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사 55:7, 44:22)고 하신다.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2). 사단은 하나님의 복된 보증을 빼앗으려고 노리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한줄기의 희망이나 한줄기의 빛이라도 없이하려고 하나, 그러나 그대들은 이것을 허락지 말아야 한다. 시험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고 말하기를“예수께서 나로 하여금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는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나에게는 자비로우신 하늘 아버지가 계시니 내가 비록 그의 사랑을 저버리고 그가 내게 주신 축복을 낭비하였을지라도 나는 일어나 내 아버지께로 가서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하고 말할 것이다. 이 비유는 어그러진 길로 나아간 자를 다시 영접하심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눅 15:18-20)었다.
그러나 그처럼 인정깊고 감동적인 이 비유라도 하늘 아버지의 무한하신 긍휼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렘 31:3)라고 하셨다. 죄인이 오히려 부친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에서 자기 재산을 낭비하는 동안에 그 아버지의 마음은 그를 심히 사모하였나니 그러므로 죄인의 심령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갈망이 일어나는 것은 그 방랑자를 아버지의 사랑의 품으로 이끌어들이기 위한 성신의 탄원과 호소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들의 앞에는 성경의 귀한 약속들이 있거늘 어찌 의심을 품을 수 있겠는가? 그 불쌍한 죄인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갈망하고 그 죄를 버리려고 원하는데 주께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발 앞에 나오는 자를 엄히 물리치시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은 단연 버리라! 우리 하늘 아버지에 대하여 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보다 더 그대들의 신념을 손상시키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나 죄인은 사랑하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을 얻어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주셨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가 택한 다음의 말씀보다 더 강하고 간곡한 언사가 어디 있으랴?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고 하셨다.
의심하고 떠는 그대들이여 쳐다보라. 대개 예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가 그대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라. 성신께서 오늘 그대를 부르신다. 전심으로 예수께로 나아가라. 그리하면 그의 축복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하나님의 허락들을 읽을 때에 그것들이 말로 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을 표시한 것임을 기억하라.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은 죄인을 무궁한 자애(慈愛)로써 생각하신다. “우리가…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과연 하나님께서 그대를 돕는 자이심을 믿으라. 그는 당신의 도덕적 형상을 사람들에게서 회복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대들이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그에게로 가까이 나아갈 때에 그는 자비와 용서로써 그대들을 가까이 하실 것이다.

7장 - 제자되는 증거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사람이 회개한 과정(過程)에 대하여 정확한 시간이나 장소나 지낸 경로(經路)는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회개하지 아니한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고 하셨다.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나 그 영향은 분명히 볼 수도 있고 감촉할 수도 있는 바람과 같이 사람의 마음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사람의 마음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사람의 마음 안에 새 생명을 나게 하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 사람을 만들어 낸다. 비록 성신의 역사는 소리가 없고 감각할 수 없을지라도 그 영향은 현저하게 드러난다. 만일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신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졌을 것 같으면 우리 생애가 그 사실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하여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융화시키기 위하여서,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또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선행만을 가지고 넉넉하다고 믿을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의 생애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없는 것을 드러낸다. 변화는 우리 품성과 습관과 우리의 직업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품성은 일시적 선행이나 일시적 악행으로 드러날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말과 행실의 경향(傾向)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없이도 행동이 외부적으로 방정(方正)한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덕망을 넓히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예모 있는 생애를 할 수도 있게도 하는 것이다. 또는 자존심이 우리로 하여금 누추한 모양을 피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심을 가진 자도 너그러운 행동을 할 수가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편에 속하였다는 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누가 마음을 지배하는가? 우리의 생각이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가 누구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는가? 우리의 가장 열정적인 애정과 우리의 최대의 정력을 누가 지배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있을 것이요 그를 생각함이 우리의 가장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의 몸을 다 그에게 바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의 형상을 입고 그의 정신을 나타내며 그의 뜻을 행하여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자는 성신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를 맺힐 것이다. 저들은 다시는 기왕의 정욕을 따라 행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고 그의 품성을 반사하게 되고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전에 미워하던 것은 지금에는 사랑하게 되고 저들이 전에 사랑하던 것은 지금 미워하게 될 것이다. 교만하고 자기 주장만 세우던 자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될 것이다. 허영심이 많고 거만하던 자가 침착하여지고 근신하게 될 것이다. 음주하던 자가 절제하고 방탕하던 자가 깨끗한 자가 될 것이다. 세상의 허영적 습관과 유행은 버리는 바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외모의 단장을 힘쓰지 않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벧전 3:3, 4) 단장할 것이다.
회개가 행위를 개선케 함이 없는 때에는 진정한 회개의 증거가 나타났다고 할 수는 없다. 죄인이 볼모잡은 것을 도로 주고 그 도둑한 물건을 돌려주며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과 동포들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갔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허물과 죄가 많은 자로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서 그의 사유하는 은혜를 입는 때에는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서 솟아 오른다. 그리고 모든 짐이 가벼워지나니 대게 그리스도께서 메어 주시는 멍에는 쉬운 연고이다. 의무는 즐거움이 되고 희생은 기쁨이 된다. 전에 흑암으로 덮였던 길이 “의로운” 햇빛으로 환하여 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운 점들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즐거워하시는 바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의 영광을 들어내려는 열성은 우리 구주의 생애의 주동력(主動力)이 되었다. 사랑은 그의 모든 행동을 아름답게 하고 고상하게 하였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지 아니한 자는 사랑을 창작할 수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사랑은 오직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마음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마음에는 사랑이 모든 행위의 원칙이 된다. 사랑은 품성을 변화시키고 감정을 지배하고 정욕을 제어하고 증오심을 사라지게 하고 성정(性情)을 고결케 한다. 이 사랑을 사람의 마음에 품으면 그것이 생애를 유쾌하게 하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정화(淨化)케 하는 감화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특히 새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 시작한 자들-이 각별히 삼가야 할 두 가지 과오가 있다. 그 하나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저희 자신을 하나님과 더불어 융화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행실과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그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자신의 힘으로 행함으로써 거룩하여지려고 자는 전연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행하는 모든 일은 사욕과 죄로 더러워진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오직 우리를 성결케 할 수 있다.
이와 정반대 되면서도 그보다 못하지 않게 위험한 과오는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그것이다. 즉 믿음으로써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자가 되는 것이요 우리의 행하는 것은 우리의 구속 문제와 하등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있어서 주의할 것은 순종이라는 것은 다만 외모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요 사랑으로 하는 봉사인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의 품성의 표현이요 사랑의 대원칙의 구현(具現)이 되나니 그러므로 이것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당신의 정부의 기초가 된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 같으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심령에 심어지면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생애에 실천되지 않을 것인가? 사랑의 원칙이 사람의 마음 가운데 심어지고 사람이 조물주의 형상대로 새로워지면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 하신 새 언약이 성취될 것이다. 그리고 율법이 마음에 새겨지면 그것이 생애를 형성하지 않을 것인가? 순종-사랑으로 하는 봉사와 충성-은 제자되는 참된 증거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요일 2:4)다고 하였다. 믿음은 사람을 순종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믿음 곧 믿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순종할 수 있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하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대개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순종은 믿음의 열매이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5, 6). 이것이 참된 증거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의 감정과 사상과 목적과 행동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요일 3:7)다. 이는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에 표시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표준에 따라 판정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순종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참람(僭濫)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당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요 15:10)한다고 하셨다. 또 성경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저 안에 거한다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3, 6).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영생을 얻는 조건은 지금도 옛날-에덴 낙원에서 우리의 시조(始祖)가 타락하기 전-과 똑같으니 곧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는 완전한 의가 요구된다. 만일에 영생을 이보다 약한 조건으로 허락하여 준다고 하면 온 우주의 행복은 위험을 받게 될 것이고 모든 재화와 비참을 일으키는 죄가 영원히 불멸(不滅)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품성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에 실패하였고 그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의 본성은 타락되어서 우리는 스스로 의로울 수 없게 되었다. 또 우리는 죄가 많고 거룩하지 못하므로 거룩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응할 만한 자신의 의는 조금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할 길을 열어 주셨다. 그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과 시험 가운데서 사셨다. 그는 죄 없는 생애를 사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지금 그는 우리 죄를 벗기시고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신다. 그대가 자신을 그에게 바치고 그를 그대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 바 된다.
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을 변화시키신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마음 가운데 거하신다. 그대는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그대의 마음을 항상 그에게 바침으로 말미암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이렇게 하는 동안에는 그는 그대의 원하고 행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 성령이시니라”(마 10:20)고 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시면 그대는 같은 정신을 나타낼 것이며 또한 같은 행실-의와 순종의 행실-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는 스스로 높일 까닭이 없다. 우리의 희망의 유일한 근거는 우리에게 입혀 주신 그리스도의 의에 있고 또한 우리 속에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선행에만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이라고 말할 때에 잊어서는 안 될 구별할 것이 있다. 신앙과는 전연 다른 일종의 믿음이 있다.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하나님의 말씀의 참됨은 사단과 그의 부하인 악한 천사들도 마음 속으로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경에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뿐만 아니라 의지(意志)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 즉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고 애정을 하나님께 두는 그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사랑으로 행하고 심령을 성결하게 만든다. 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여진다. 거듭나지 못하였을 때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복종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또한 복종할 수도 없었던 마음이 이제는 율법의 거룩한 계명을 즐거워하게 되고 시편 기자와 같이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하고 부르짖게 된다. 그리고 율법의 의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롬 8:1) 우리에게서 성취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유하시는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저희의 품성이 불완전하고 저희의 생애가 결함이 많은 것을 느끼므로 저희 마음이 과연 성신으로 말미암아 거듭났는지를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에게 나는 말하노니 “낙심하여 뒤로 물러가지 말라.”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과실로 인하여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자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낙담하지 말 것이다. 비록 우리가 원수에게 실패를 당하였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거나 싫어하는 바 되거나 배척을 당한 것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신다. 요한은 말하기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고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요 16:27)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잊지 말라. 그는 그대를 당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시기를 원하시고 당신의 순결함과 거룩함이 그대에게서 반사됨을 보시고자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대가 자신을 그에게 바치기만 하면 그대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이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더욱 확실히 믿으라. 우리 자신의 힘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 구주의 능력을 의지하자. 그리하면 “내 얼굴을 돕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예수께로 더 가까이 갈수록 그대의 허물이 그대의 눈에 더 많이 드러나 보일 것이니 대개 이는 그대의 시력(視力)이 더욱 밝아져서 그대의 불완전한 것이 예수의 완전하신 품성에 대조되어 더욱 뚜렷이 나타나 보이게 되는 까닭이다. 이것은 사단의 미혹이 그 힘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에 하나님의 성신의 생기 있는 감화가 그대를 각성시키고 있는 증거이다.
자기의 죄가 흉악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의 마음에는 예수에 대한 깊은 사랑이 뿌리 박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사람은 그의 신성한 품성을 감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도덕적 결점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가 아직도 그리스도의 미점(美點)과 탁월하심을 보지 못하였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자랑할만한 것이 적다고 보면 볼수록 우리는 우리 구주의 무한하신 순결과 사랑 가운데서 존중할만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죄가 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를 사유하시는 자에게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속절없음을 깨닫고 그리스도께 손을 내밀 때에 그는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다. 도움을 요구하는 느낌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게로 이끌게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더욱 고상한 관찰을 하게 될 것이고 그의 형상을 더욱 완전히 반사하게 될 것이다.

8장 - 그리스도께 이르기까지 자라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마음의 변화를 성경에는 새로 나는 것으로 말하였다. 또는 그것을 농부가 뿌린 좋은 종자가 싹이 나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이와 같이 회개하고 새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간 자들은 “갓난 아이”(벧전 2:2)와 같이 “점점 자라”(엡 4:15)(구역)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남녀가 되는 것이다. 마치 밭에 심은 좋은 종자가 자라서 열매를 맺음과 같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3)고 하였다. 이렇게 천연계의 생물에서 여러 가지 실례를 인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신령적 생명의 신비한 진리를 더욱 깨닫기 쉽게 하였다.
사람의 온갖 지혜와 재주를 다 가지고라도 천연계 가운데 있는 아무리 작은 물체에라도 생명을 만들어서 넣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생명으로만 식물이나 동물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령적 생명이 마음 가운데 생기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요 3:3-영어 성경 난외주 참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생명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이 그러한 것처럼 자라남도 또한 그러하다. 꽃봉오리를 피게 하고 꽃이 열매맺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씨가 발육되어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막 4:28)을 이루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선지자 호세아도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하기를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호 14:5, 7)라고 하였다. 또 예수께서도 이르시기를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눅 12:27) 하셨다. 모든 초목과 꽃들은 저희의 염려나 걱정이나 노력으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께서 저희의 생명을 위하여 공급하시는 것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무슨 염려나 자기의 힘으로써 저희의 키를 조금이라도 늘일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그대들도 그대들의 염려나 노력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자라날 수 없는 것이다. 초목이나 어린 아이는 저희의 주위에 있는 것들에게서 저희의 생명을 위하여 공급되는 것들-공기, 일광, 영양-로 말마암아 자라나는 것이다. 이 천연계의 선물들이 동물과 식물에게 관계되고 있는 그러한 관계가 그리스도와 그를 의지하는 자들 사이에도 있는 것이다. 그는 저들의 “영원한 빛”(사 60:19)이시요 “해요 방패”(시 84:11)시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호 14:5)고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이 임하리니”(시 72:6) 그는 생수이시며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요 6:33) “하나님의 떡이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무한한 선물로 주심으로 온 세상을 은혜의 분위기로 두루 싸기를 마치 공기가 지구를 두루 싼 것 같이 하셨다. 누구든지 이 생기를 주는 분위기를 호흡하기를 선택하는 자들은 살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남녀가 되기까지 자라날 것이다.
꽃이 태양을 향함으로 밝은 햇빛이 꽃의 균정미(均整美)를 이루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의로운 해”이신 예수께로 향할 때에 하늘의 광선이 우리에게 비치게 되고 우리의 품성은 계발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다음의 말씀은 같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 5). 그대들이 거룩한 생애를 살려고 하면 가지가 자라고 열매를 맺기 위하여 원체에 붙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 의존(依存)해야 할 것이다.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 생명도 없는 것이다. 시험을 대항하며 은혜 가운데 자라며 정결 하여질 능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안에 거함으로 품성이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그에게서 생명을 받음으로 시들지도 않고 열매맺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은 저희 혼자서 무슨 일을 좀 하여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저희는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하였으니 이제는 저희 자신의 힘으로 옳은 생애를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모두 실패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셨다. 우리가 은혜 가운데 자라나는 것이나 우리의 기쁨이나 우리의 유용성(有用性)이 모두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여부에 달렸다. 우리가 은혜 가운데 자라는 것도, 날마다 시간마다 그와 더불어 교통함으로, 그의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믿음을 주장하실 뿐 아니라 온전케 하시는 자시다. 그리스도는 처음과 나중이요 항상 계시는 자시다. 그는 우리의 가는 길에 처음과 나중에만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가는 길의 발자국마다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16:8)고 하였다.
그대들은 혹 “내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할까”하고 묻는가? 그대들이 처음에 그를 받아들인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 10:38). 그대들은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그를 봉사하며 순종하기 위하여 자신을 바쳤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다. 그대들은 자신의 죄를 속할 수도 없고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도 없으나 자신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줄로 믿었으니,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동시에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날 것이다. 즉 바치고, 받음으로 자라날 것이다. 그대들은 모든 것-마음과 의지와 봉사-를 바칠 것이니 그의 모든 요구를 응하기 위하여 그대 자신을 그에게 바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그대의 마음 안에 계셔서 그대의 힘과 그대의 의와 그대의 영원한 돕는 자가 되시는 온갖 축복이 충만한 그리스도-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을 순종할 힘을 얻을 것이다.
아침마다 그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라. 그리고 이 일을 그대의 첫째로 할 일로 삼으라. 또한 기도하기를 “오 주여! 나를 받으사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삼으소서. 나는 나의 모든 계획을 당신의 발앞에 놓나이다. 오늘 나를 당신의 일에 써 주시옵소서. 나와 같이하여 주시고 나의 모든 일이 당신 안에서 성취되게 하옵소서” 할 것이다. 이것이 날마다 행할 일과이다. 아침마다 그 날을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라. 모든 계획을 하나님께 맡겨 그의 섭리에 따라 행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들은 날마다 그 생애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게 되고 따라서 그대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모방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애는 안정(安靜)한 생애이다. 광희(狂喜)적 기분은 없을지라도 계속적 안정한 의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대들의 소망은 그대들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 있다. 그대들의 연약함을 그의 힘과 연합하고 그대들의 어리석음을 그의 지혜와 연합하고 그대들의 의지의 박약함을 그의 견인불발과 연합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자신을 생각지 말고 그리스도를 쳐다보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품성의 아름다움과 완전하심에 대하여 생각하라. 극기의 그리스도, 굴욕을 받으신 그리스도, 순결하고 거룩하신 그리스도, 무한히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이것이 심령의 명상할 제목이다. 그대들이 그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그를 모방함으로, 그를 온전히 의지함으로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하셨다. 이 말씀에는 안식과 확고함과 신뢰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다시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초청을 하신다. 시편 기자의 말도 역시 이와 같은 뜻을 표시하여 이르기를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시 37:7)고 하였다. 또한 이사야도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사 30:15)이라는 보증을 주었다. 이 안식은 활동함이 없는 데서 얻을 것이 아니니 대게 구세주의 초청 가운데는 다음의 말씀과 같이 안식에 대한 허락과 아울러 일하라는 요청도 포함되어 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마 11:29)라.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이 가장 충분히 안식함을 얻는 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장 열심으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자신에 대하여서만 생각할 때에는 우리는 힘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구주에게서 떠나게 함으로 우리의 심령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교통하는 일을 방해하려는 것은 사단이 항상 꾀하는 일이다. 세상의 오락, 생활상 염려와 고민과 비통, 다른 사람의 결점, 또는 자신의 결점과 불완전함, 이런 것들의 전부 혹은 일부에 우리의 마음을 돌리도록 사단은 애쓸 것이다. 그의 간계(奸計)에 빠지지 말라. 사단은 참으로 양심대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저희의 결점과 약점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저희를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여서 자기가 승리를 얻으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 삼지 말고 또는 구원을 얻을까 못 얻을까에 대하여 걱정과 염려를 하지 말 것이다. 이러한 염려는 사람을 우리 힘의 근원이 되시는 자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이다. 그대의 영혼을 하나님의 보호에 맡기고 그를 신뢰하라.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생각하자. 그를 생각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잊어버리라. 모든 의혹을 버리고 공포심을 없이하여 버리라.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고 말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는 그대가 맡긴 것을 능히 보호하실 수 있다. 그대가 자신을 그의 손에 맡기면 그는 그대로 하여금 사랑하신 자로 말미암아 이기고도 남음이 있게 하시리라.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셨을 때에 그는 사람 자신의 선택 외에는 아무런 능력으로도 능히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로써 당신 자신을 인류에게 붙들어 매셨다. 사단은 항상 이 줄을 끊도록-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에게서 끊도록-여러가지 유혹들로써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는 깨어서 애쓰며 기도할 필요가 있나니 그리하여 어떠한 유혹이라도 우리로 하여금 다른 주인을 선택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대개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할 자유가 있는 연고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항상 그리스도만 주목하면 그는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예수를 바라볼 때에는 우리는 안전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우리를 그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우리는 그를 항상 바라보는 가운데서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예수의 처음 제자들이 저희의 구주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게 된 것도 역시 이와 같은 모양으로 된 것이다. 그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저들은 그가 저희에게 필요함을 느꼈다. 저들은 그를 찾고 만나서 그를 따랐다. 저들은 집에서나 식탁에서나 골방에서나 밭에서나 그와 같이 하였다. 저들은 마치 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다니면서 날마다 그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거룩한 진리를 배웠다. 저들은 종이 상전을 주목하는 것처럼 그를 주목하면서 저희가 할 의무를 배웠다. 이 제자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약 5:17)이었다. 저들도 우리와 같이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하였던 것이다. 저들도 거룩한 생애를 살기 위하여 우리와 같이 은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구주의 형상을 가장 완전히 반사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도 본래 그러한 아름다운 품성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며 명예욕이 많았을 뿐 아니라 조급하여 억울함을 당할 때에 분개하기를 잘하였다. 그러나 거룩하신 자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에게 나타났을 때에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하여졌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일상 생애 가운데 나타난 능력과 인내, 권능과 애정, 위엄(威嚴)과 겸손을 보았을 때에 그의 마음은 찬탄과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날마다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려 가게 되어 마침내 그는 자기 주님에 대한 사랑에 자신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의 조급하고 야심 많은 성미는 그리스도의 조성(造成)하시는 능력에 맡긴 바 되었다. 성신의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그의 마음을 새롭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 그의 품성을 변화시켰다. 이것은 예수와 연합함으로 생기는 확실한 결과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거하시면 그의 성질은 온전히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과 그의 사랑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심령을 안정시키고 사상과 소원을 하나님과 하늘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그가 아직도 임재하여 계시는 감(感)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과 빛이 충만한 개인적인 임재이었다. 저들과 같이 다니시고 이야기하시고 기도하신 예수, 저들의 마음에 희망과 위안을 주신 구주께서 오히려 평강의 기별을 말씀하시는 도중에 저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오르셨는데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음성이 그를 영접하는 구름 같은 천사들의 무리 가운데서 제자들에게 들려왔다. 그는 사람의 형체를 쓰신대로 하늘에 오르셨다. 저들은 그가 여전히 저희의 친구와 구주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계신 것과 그의 동정은 변함이 없는 것과 그는 아직도 고생하는 인류로 더불어 일체가 되시는 것을 알았다. 그는 구속받은 자를 위하여 당신이 갚으신 값을 기억케 하는 의미로 자기의 상한 수족을 아버지께 보이면서 당신의 보혈의 공로를 하나님께 제시(提示)하신다는 것을 저들은 알았다. 저들은 예수께서 저희를 위하여 예비하시려고 승천하신 것과 또 그가 와서 저희를 당신에게로 데려가실 것을 알았다.
예수 승천 후에는 저들이 함께 모일 때마다 예수의 이름으로 저희의 소원을 하늘 아버지께 열심으로 아뢰었다. 저희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 24)고 하신 구주의 보증의 말씀을 반복하면서 엄숙하게 엎드려 기도하였다. 저희는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는 유력한 논증을 가지고 신앙의 손을 더욱 높이 쳐들었다. 그리하여 오순절 날에는 저희에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너희 속에 계”(요 14:17)신 보혜사가 저희에게 임하였다. 그가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라고 하셨다. 그 때부터는 그리스도께서 성신을 통하여 당신의 자녀들 마음 속에 항상 거하시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저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관계가 그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셨기 때보다 더욱 밀접하게 되었다. 내재(內在)하신 그리스도의 빛과 사랑과 권능이 저들을 통하여 비치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행 4:13) 알았다.
그리스도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구주가 되신 것처럼 오늘날의 당신의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 대개 그가 자기를 둘러 모인 제자의 적은 무리와 더불어 마지막으로 올린 기도 가운데도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되 그가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기를 구하셨다. 이 연합이야말로 얼마나 귀한 연합인가! 구주께서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아들이…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5:19).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면 그는 우리 속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빌 2:13)실 것이다. 우리는 그가 행하신 것 같이 행하게 될 것이요 또한 같은 정신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사랑하며 그의 안에 거함으로써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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