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적 개혁사업의 중심: 십계명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 58:12절)
계속되어야 할 종교개혁 –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오늘날의 개신교회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때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해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개신교 교단과 신학교들은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크고 작은 다양한 행사들을 개최했습니다.
이 행사들이 강조한 두 가지의 인상 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 종교개혁은 500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되어 500년째 계속되어 왔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니다. 둘째, 오늘날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급격한 세속화와 지탄을 받을 정도로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 안타까운 이유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은 강조하면서 ‘율법과 순종의 삶’은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번째 메시지는, 성경은 인용하지만 성경의 핵심인 하나님의 율법과 십계명은 소홀히 취급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지적하는 자성의 목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에 대한 연구가 예전만 못한 오늘날 ‘십계명’은 한국 기독교에 매우 절실하게 필요한 주제입니다.
율법에 대한 도전 – 하나님의 율법을 가장 먼저 대적한 것은 악의 장본인인 사탄입니다. 사탄은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했습니까? 하나님의 법에 대한 도전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도전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 만연해 있는 율법 무용론이나 폐기론은 하나님의 법을 대적함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율법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옹호하고 회복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반복되는 역사 – 성경 역사를 살펴보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법을 소홀히 하고 잊어버리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 사회와 국가가 점차 불법과 무질서의 혼란에 빠지게 되면 뒤를 이어 고난과 시련의 기간이 시작됩니다. 이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들의 주도로 기도와 회개 운동이 일어나고, 이어서 개인과 집단에서 영적 부흥과 개혁운동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영적 회복사업의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법을 견고히 세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회복 사업과 개혁자들이 나타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이 회복 운동을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우며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또한 그런 운동을 수행할 자들을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 무너진 “길을 수축하”는 자로 묘사했습니다. 오늘날 세상 곳곳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무리와 교회들에서 이러한 운동이 계속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2) 되찾아야 할 교회의 유산: 십계명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그대로 행치 아니하고”(렘 9:13)
교회에 넘쳐나고 있는 값싼 복음 – 오늘날 교회에서는 죄를 경고하는 설교를 거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안타깝게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얻는 ‘값싼 복음’과 ‘기복신앙’ 두 가지를 강조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반면에 함께 강조되어야 할 율법과 회개에 대한 기별은 상대적으로 도외시되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 공동체와 ‘같은 것’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교회는 교육, 친교, 문화, 봉사, 구제 활동 등 세상 공동체들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 중에는 죄를 회개하고 사함받는 속죄의 기능이 있습니다. 교회가 이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세상 공동체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닮아가는 교회 – 요즘 들어 교육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일탈 현상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학교 교육이 학원 교육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염려의 소리도 들립니다. 입시 위주, 취업 위주의 교육은 과거에 추구했던 전인적 인간 교육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경향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천국 가는 학교가 아니라 천국 가는 학원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지난 2010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본부에서 한국 교회에 대한 여론 조사를 했습니다. 이 여론 조사에서 충격적인 것은 “한국 교회를 신뢰할 수 있느냐?”는 항목에서 비그리스도인 응답자들 대부분이 신뢰할 수 없다는 응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주요 이유는 교인들의 말과 행동의 불일치라고 했습니다.
되찾아야 할 유산 –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라는 책은 오늘날 교회에 스며든 세속적 사상과 가치관들을 비판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을 비그리스도인들과 비교했을 때 더 비윤리적이지 않은데도 더 많은 비판을 받는 까닭이 무엇이냐는 질문과 응답이 나옵니다. 그 응답은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세상 사람들과 별다른 점이 없는데 고상한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세속적인 삶을 살면서도 괜히 남들보다 선한 척 다른 척하려다 보니 더 나쁜 평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행사나 예배에서 십계명이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하여 어떤 교수는 “십계명은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자산”이라고 설명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실제로 개신교단 소속 교회들에서는 십계명에 대한 강조가 거의 사라지고 있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는 교회는 많지만 십계명은 교회 예배에서 그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3) 사랑하라는 법:십계명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눅 10:25)
루터는 <대요리문답>에서 “십계명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성경 전체를 아는 것이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 즉 십계명을 통해서 나타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십계명의 근본원리 – 한 율법사가 예수께 나아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사가 대답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5-27)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서 율법은 십계명을 말하고 있음을 율법사의 대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전공한 율법사가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는 말로 십계명의 근본원리를 요약해서 대답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네 대답이 옳도다”(눅 10:28)라고 예수께서 칭찬하신 것은,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뜻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왜 사랑해야 하는가? –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주신 명령입니다. 한 사람이 살기가 너무 힘들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가 키우는 고양이를 먼저 죽인 후 자기도 죽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계획을 실행하려는데 그날따라 고양이가 유난히 애교를 떨어 차마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고양이 때문에 죽기를 포기했습니다. 옆에서 자기를 지지해 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고양이의 사랑을 통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삶의 행복과 의미를 갖게됩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가 곁에 있을 때 삶의 이유와 행복을 발견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 있기 때문에 잘 견뎌 냅니다. 스트레스로 직장을 그만두고 싶을 때나 이혼을 생각하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자녀가 있으면 삶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종 아내나 남편이 있는데도 혼자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녀가 있는데도 외롭고 슬플 때가 있습니다. 부족한 그대로 자기를 받아 주고 감싸 줄 존재를 찾지만 그런 온전한 친구는 세상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면 인간은 행복을 얻게 됩니다.
4) 숨겨진 진리의 보화: 십계명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1530년 마틴 루터는 <십계명 주해서> 서론에서 십계명은 “모든 약속 중의 약속, 모든 신앙의 원천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약속을 포괄하는 지혜의 원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10개 항목으로 구성된 십계명은 짧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문장 속에 내포되어 있는 사상과 정신은 심오합니다.
숨겨진 아름다움 – 필자는 어느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학생들과 네팔로 단기 선교 봉사를 다녀왔습니다. 몇 년 전 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이 나라에서 다양한 봉사 활동을 펼치는 것은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봉사에 참여한 학생들은 네팔 어린이들을 보면서 “눈이 너무도 맑고 아름다워요. 그들을 보면 제 마음이 평안해져요!”라고 말했습니다. 네팔 어린이들은 깨끗이 씻지도 않았고 예쁜 옷을 입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맑은 눈에서 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을 안아 주고 예뻐하며 피곤한 줄 모르는 우리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마음의 눈 또한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것이 아닌 내면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시편 기자의 율법사랑 – 시편 119편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그는 사람이 아닌 율법에 대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율법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마치 흙 속에서 보화를 발견하고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처럼 십계명 속에서 진리의 보화를 발견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150절 전체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경탄과 찬양으로 가득합니다.
시편 기자가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라고 고백한 것은 그 문장 안에 스며있는 심오한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의 정신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존경하고 죽기까지 사랑하게 된 것도 결코 예수님의 외형적 조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제자들이 만나본 예수님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사 53:2)는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이 주님을 위해 죽기(순교)까지 할 만큼 예수님을 따르고 존경한 것은 예수님의 내면적인 것 곧 그의 사상과 인격과 가르침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됨 – 시편 119편 기자는 예수의 제자들이나 신약 교회 못지않게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사랑하듯이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했습니다.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고 진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요 14:9)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백성들은 예언된 메시야를 마음에 그리며 살았습니다. 메시야를 볼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예수님을 만나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율법에서 신약 교회 못지않게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5) 축복으로 가득한 법: 십계명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총 150편)의 서론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장입니다. 시편을 열면 제일 먼저 읽게 되는 1편은 ‘문지방 시편(Threshold)’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시편 1편의 첫마디는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가까이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읽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물가에 심겨진 나무 – 율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어떤 복을 받습니까? 시편 1편 3절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을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곧 율법을 순종하며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얻는 축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필자는 몇 년 전 성지 순례를 하면서 이집트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 가고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기거했던 땅, 그리고 아기 예수가 잠시 도피했던 그 땅을 순례하면서 새삼 느낀 것은 이집트는 국토의 대부분이 암석과 사막으로 된 척박하고 황량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이 메마른 땅에 사는 사람들은 물이 흐르고 식물이 풍성한 땅을 늘 사모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집트에도 그런 축복의 땅이 존재합니다. 그곳은 나일강 좌우 주변(주로 2~5킬로미터 거리)의 땅입니다. 이곳에는 기적과도 같이 푸른 나무와 농작물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시장에서 볼 수 있는 먹음직스런 과일과 채소는 모두 이곳에서 생산된 것입니다. 시편 1편에 언급된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비유가 너무도 생생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이렇게 생생하게 비유를 들며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 –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복 있는 사람을, 율법을 지키는 자 혹은 순종하는 자라고 하지 않고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마음에는 순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순종이 즐겁고, 순종을 하면 할수록 더욱 큰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순종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으시고,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늘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 전에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며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 삶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6) 하나님의 성육신: 십계명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신 4:13)
필자가 신학대학원 재학 중에 아내와 편지를 주고받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한 장의 편지를 위해 여러 장의 편지지를 버리면서 공을 들여 한 글자 한 글자를 썼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다 받은 답장을 가슴 두근거리며 읽고 또 읽으며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 내기 위해 애쓰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돌 판에 새겨진 하나님 사랑 – 십계명은 하나님이 직접 쓰셔서 보낸 편지와 같습니다. 십계명은 고대에 사용되던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이 아니고 돌 판에 새겨 기록되었습니다. 성경 말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편지라고 할 수 있지만 성경 말씀과 십계명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경 기자들을 통해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 기자는 꿈과 이상 중에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자기의 표현법으로 알맞은 단어를 선택해서 문장을 기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사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기자는 그가 받은 계시의 내용을 자기의 말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한 단어 한 단어를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시고 “친히 쓰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기록되었지만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진리는 심오하고 방대해서 오묘한 말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진 사랑의 법 –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이고, 하나님이 말씀이 되신 것이 십계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듯이, 십계명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바른길을 가르쳐 주시듯이, 십계명 또한 우리를 교훈하고 축복의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우리의 삶 속에 실천됨으로 계속 우리와 함께 살아 있듯이, 십계명의 말씀도 하나님 백성의 삶을 통해 계속 살아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양피지로 된 두루마리 책에 기록되었지만 십계명은 돌 판에 새겨졌습니다. 돌 판에 새겨진 글자는 흐리게 하거나 지울 수 없고 다시 쓸 수도 없습니다. 돌 판은 약속한 것을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특성을 나타냅니다. 성경 말씀이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십계명은 더욱 더 한 글자 한 획도 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십계명 속에 나타난 오묘한 사상이 우리의 심비에 새겨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7) 하나님과 백성의 언약: 십계명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5)
십계명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경직된 인상을 줍니다. 게다가 십계명은 열 개의 항목 중에서 여덟 개가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언약 문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언약을 맺는 것을 인간관계에서 찾아본다면 남녀 두 사람의 결혼 서약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결혼 서약을 통해 두 남녀가 남편과 아내가 되듯이, 하나님과 인간이 상호 간에 언약 맺음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보은의 언약 십계명 – 고고학적 발굴로 인해 십계명은 고대 근동 아시아의 종주권 조약과 유사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지역에서의 종주권 조약의 규정은 종주가 무조건적으로 봉신에게 강압하여 부과하는 법률이 아니라 종주가 베푼 과거의 은혜에 감사하여 봉신이 지켜야 하는 보은의 규정이었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면 십계명은 하늘의 여호와(종주)께서 베푼 출애굽의 은혜에 대해 이스라엘(봉신)이 감사의 마음으로 지킨다는 언약의 규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얼마 전까지 애굽에서 종노릇하며 고통스럽게 보냈던 지난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기적과 권세로 바로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추격하는 바로의 군사들을 홍해에서 어떻게 물리치셨으며, 거친 광야에서 어떻게 물과 만나로 그들을 먹이셨는지 종주(만왕의 왕)의 은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개인 대 개인의 약속 – 십계명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제3인칭)과의 언약이 아니라 “너는 나 외에는…”과 같이 서로를 확실히 아는 사람(제2인칭) 간에 맺어진 일대 일의 약속입니다. 결혼 서약은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 사이의 언약입니다. 서로를 잘 알고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후에 결혼 언약을 체결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만이 침례예식에 동참하여 침례서약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을 맺는 것처럼,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먼저 하나님과 그의 구원을 경험한 후에 스스로의 선택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누가 언약의 제안자인가 – 십계명에 있어서 주목할 점은 누가 먼저 이 언약을 체결할 것을 제안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어느 편이 언약을 맺을 필요가 더 절실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은 거할 땅도 집도 없었고, 그들을 지켜 줄 국가 체계나 군사도 없는 광야의 방랑자 신세였습니다. 그들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줄 도움이 절실했고, 그 도움을 보증하는 언약이 수반되는 동맹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딱한 처지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서 먼저 언약을 제안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나온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에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맺어야만 애굽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조건을 달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을 먼저 구원하신 후에 그들에게 언약을 맺자고 요청하셨습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장 참조).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언약을 맺을 백성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8) 영원히 유효한 법: 십계명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하나님의 품성은 변치 않음 – “십계명은 하나님의 품성을 반영한 것으로서, 도덕적이고 영적이고 포괄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원칙들을 포함”(Doc, 220)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십계명도 불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히 정하신 바요”(시 111:7~8).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시 119:152).
하나님이 친히 기록한 십계명에는 인간을 향한 그분의 뜻이 열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인간에게 필요한 원칙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은 매우 포괄적이고 함축적이어서 하나님과 이웃 사람과의 관계에 수반되는 사람의 의무를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예언된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 백성은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계 12:17)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의 가치를 삶으로 실천하며 하나님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십계명의 계율은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만민을 위한 교훈과 통치 원칙으로 주신 것입니다”(PP, 305).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언약에도 기한이 있습니까? 우리는 광고를 보고 그 내용을 100퍼센트 믿지 않습니다. 광고주가 원하는 대로 그럴싸하게 상품을 포장해서 광고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10년 혹은 20년을 믿고 쓸 수 있는 상품을 찾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성 중 하나는 ‘불변성’입니다. 사람은 이익에 따라 수시로 변하지만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분입니다.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단 6:26)이십니다. 한 번 말씀하신 것은 잊지 않고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입니다. 십계명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변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히 6:16-17)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불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장래의 소망도 여전히 불변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소망 – 현대 그리스도인은 십계명을 구시대의 유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십계명의 ‘하라’ ‘하지 말라’는 교훈 방식은 고리타분한 전통주의와 고대 가부장제도의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십계명 중에는 언약의 유효 기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셋째 계명에 명시된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는 말씀 중에 ‘천대’는 천(千)이라는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의 영원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당신의 법을 돌 판에 쓰셨다는 것은 기록이 지워지거나 바뀔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축복의 언약도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변치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간직하고 있는 약속의 성취에 대한 희망도 변치 않아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9) 순종과 축복의 법: 십계명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 하매”(출 19:8)
실생활에 관한 법 – 십계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실천과 행동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여덟 개의 ‘하지 말라’와 두 개의 ‘하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람이 행하고 실천해야 할 사항들을 말해 줍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실생활과 밀착된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 세계를 도외시하고 신비적 가르침이나 수행을 통해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과 단절된 세계도 아니고, 무엇인가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철학적인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 – 진리를 아는 것과 믿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서 그만큼 회심하거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믿을 때에만 우리 안에서 기쁨과 변화가 시작됩니다. 십자가를 나를 위한 것이라고 믿고 받아들일 때 내 안에 구원의 기쁨과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 아는 것은 많은데 구원의 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과, 성경을 많이 알지 못하지만 아는 만큼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 중에 누가 더 복된 삶을 사는 것일까요?
순종과 축복 – 진리를 ‘알고 있는 신앙’과 ‘실천하는 신앙’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십계명 속에 포함된 심오한 의미를 알고 깨달을 때의 기쁨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할 때 약속된 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아는 것도 복이고, 진리를 믿는 것도 복이지만 진리의 말을 실천할 때 축복의 약속이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실생활의 예를 몇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걸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다면 건강해질 수 있을까요?
성경을 읽으면 복이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읽지 않는다면 믿음의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요? 흔히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이 있다’거나 ‘봉사는 봉사를 받는 사람에게 축복이 되지만 봉사하는 사람에게 더 큰 축복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봉사에 대해 이론적으로 알기는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복이 무엇인지 알거나 체험할 수 있을까요?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필요함 – 여러분은 성경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경을 ‘믿고’ 있습니까?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으면 믿음이 좋은 것일까요? 연약하고 죄 된 인간들은, 행동은 없이 생각과 지식으로만 신앙생활 하는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고 나름대로 믿음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실천적인 행동으로 보여지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스런 구원의 날을 기다리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믿고 사는 성도일 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축복을 경험하는 성도입니다.
10) 상호 언약의 문서: 십계명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4)
인간의 부르짖음과 응답 – 모세는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 주변에서 양 떼를 지키다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불꽃에 휩싸인 떨기나무를 보려고 다가가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여 부르짖는”(출 2:23) 히브리인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애굽 땅에 오래 머물면서 히브리인들은 선조들이 믿던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하나님의 율법을 소홀히 했고, 율법의 핵심인 안식일을 잊었고, 그 결과 하나님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셨습니다. 모세가 애굽에 거하던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했을 때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정도로 그들에게 하나님은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었어도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재자를 보냄 –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출 2:24)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을 체험한 후 십계명 언약 문서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완수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죄에 종노릇하고 소망 없이 사는 세상 백성들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광야의 모세를 찾으셨듯이 일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침례 서약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이면, 모세가 사명을 수행했듯이 우리의 사명도 실행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중재자 –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애굽 땅으로 보내셨듯이 지금도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계 각 곳에 선교사를 보내고 계십니다. 과거 유럽은 강력한 기독교 국가였고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이제는 무신론 국가와 백성이 되고 있습니다. 한때는 기독교를 백인의 종교로 여겼는데 이제는 동양의 선교사들이 백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 유럽으로 파송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한국에도 외국인 선교사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뜨뜻미지근해진 한국 교회에 비해 열정적인 아프리카의 선교사들이 대한민국 땅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는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면서 주저했지만, 임무를 받아들인 후에는 신속하게 하나님의 일에 착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신속한 복종에 축복하셨으므로, 그는 능변가가 되고…사업을 행할 수 있는 매우 적합한 사람이 되었다”(PP, 255).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부름에 응하는 자에게 사명을 수행할 능력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