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존재하며 살아가는 데 필수 불가결한 두 가지 요소는 ‘생명’과 ‘물질’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물질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물질을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본능적인 욕망이 있고, 그 물질을 획득하고 확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가 돈과 관련이 있다. 돈 때문에 울고, 돈 때문에 웃고,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돈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고, 돈 때문에 거짓말도 하고, 돈 때문에 자살도 하고, 돈 때문에 결혼하는 경우도 있고, 돈 때문에 이혼도 한다. 심지어 정치에서도 대부분의 정책이 경제 그리고 돈 문제와 관련을 갖는다. 종교 단체에서조차 돈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 그칠 새 없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목사들도 돈 문제로 법정에 서서 세상의 재판을 받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목회자와 돈에 대한 성서의 원칙
교회에는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헌금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교회마다 이 헌금과 교회의 재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 비일비재하고 거의 모든 경우에 교회 재정 문제의 핵심에는 목회자가 관련되어 있다. 목회자가 돈을 탐하거나 욕심내면 그 자신과 그가 담임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모두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다. 그래서 목회자는 돈이나 재물에 대하여 시종일관 초연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구약 시대 목회자에 해당하는 레위 지파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에 재산을 분배받지 않았다.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신 10:9). 제사장 직분을 맡은 레위 지파 사람들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경쟁하며 투쟁하며 먹고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먹여 주시는 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열한 지파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드려서 레위 지파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분부하셨다. 이러한 제도 안에서 레위 지파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업이 번성하여 부요하게 잘살 수 있는 여건이 결코 아니었다. 그저 굶주리지 않고 평범하게 먹고사는 정도의 수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나 신약 시대 이후의 목회자들에게 바라시는 뜻이다.
돈 때문에 병드는 한국 교회
사람이 살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고 교회 사업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돈을 잘못 사용하면 그것이 재난이 되고 재앙이 된다.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은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명심해야 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목회자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이 돈 때문에 시험에 들어 본인도 수욕을 당하고 교회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고, 수많은 비신자가 기독교를 경시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일들이 다반사다. 중대형 교회에서 지급하는 지나치게 많은 사례비, 각종 보조금, 지원금, 수십억 대에 이르는 퇴직금 등 이러한 사례들이 공개될 뿐 아니라 심지어 목회자들이 교회의 재산권에까지 개입하여 사유화하려는 시도 끝에 법정 소송에 휘말려 기독교 망신, 하나님 망신당하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니, 주님이 오늘날 이 땅에 계신다면 통곡을 하실 것이다. 목회자가 재물에 치중하게 되면 성경의 용어로 ‘목자’가 아니라 ‘삯꾼’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한 삯꾼의 정신으로 목회를 하다 보면 교회는 병들게 되고 성도들의 신앙은 피폐하게 된다. 물욕을 극복하지 못한 목회자들은 주저함 없이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헌금 실적에 의해서 교인들을 평가할 것이고, 그러한 목회자를 바라보는 신도들은 실망하여 분노하며 목사와 투쟁하든지 아니면 교회를 떠나게 된다. 결국 구원받는 성도들로 가득 채워져야 할 교회가 일반적인 사교(社交) 집단으로 전락하여 생명력을 잃어버린 황량한 교회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청렴결백한 모습으로 적절한 사례비 외에는 사양하거나 아니면 선교지에 후원하면서 검소하게 살아가는 목회자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감추어져 있고 비위(非違)나 비리(非理)를 저지르는 목회자들은 언제나 크게 부각되기 때문에 교회는 더욱 급속히 신뢰를 상실하며 선교의 문이 막히는 것이다. 요즘 세간에 문제가 되는 교회 세습도 그 핵심에는 재산에 대한 목회자들의 탐욕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
목회자가 걸려 넘어지기 쉬운 3대 덫이 있다면 ‘돈’과 ‘여자’와 ‘명예’일 것이다. 이 중에서 돈과 여자에 관련된 문제가 드러나면 그것은 곧 정죄를 받고 지탄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명예’를 탐하고 추구하는 것은 좀처럼 정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명예라는 것의 바탕에는 소위 ‘자만심’과 ‘교만심’이라는 것이 깔려 있고, 그것은 성경에서 매우 엄격하게 정죄하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이다.
이 세상에 최초로 악의 씨를 뿌리기 시작한 루시퍼도 자기를 높여서 하나님과 동등해지고자 하는 명예를 탐하는 교만심 때문에 타락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2~14). 심지어 인류의 조상 하와도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창 3:5) 된다는 말 즉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범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이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잠 16:5)신다. 그런데 오늘날 허다하게 많은 목회자가 여호와가 미워하시는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하고 있다.
범교단적인 큰 행사를 하게 되면 일일이 살펴보기에도 곤란할 정도로 수많은 임원의 이름들이 광고 지면을 가득 채운다. 각각 무슨 역할들을 하는지 잘 모를 일이다. 목사들의 명함에는 별로 의미도 없고 뚜렷한 역할도 없는 직함들이 즐비하다. 영어를 거의 못하는 미국산 박사 학위 소지자가 왜 그렇게도 많은지 모르겠다. 총회장 선거나 단체장 선거 때가 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들이 정상적인 일처럼 벌어진다. 중상모략, 흑색선전, 금전살포 등 세상의 눈으로 보아도 수치스러운 일들이 공개적으로 일어난다. 오늘 우리 목회자들의 모습은 목자장이신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도 상이하고 이질적이다.
목회자의 모델 – 목자장 예수 그리스도
루시퍼의 교만의 결과로 초래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몹시 가난하셨고, 겸손하셨고,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셨다.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은 사탄과는 반대되는 정신 곧 “하나님과 동등됨”(빌 2:6)을 포기하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마구간에 태어나셔서 한평생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시다가 마침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빌 2:8)하심으로 철저한 희생적 삶을 사셨다. 바로 이 모습이 오늘날 교회를 지도하고 성도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목사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이 땅에서 정직한 양심을 가지고 교회를 목양하는 모든 목사는 날마다 목자장이시며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며, 그분을 닮기 위해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하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그분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으셨고 가난하셨는데, 나는 어떠한가? 그분은 참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겸손하셨는데,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헌신하셨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품고 있으며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한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은 목사의 심령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