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6] 그리스도인은 이제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으니 율법을 속박하는 ‘법’으로 지키지는 않지만, 율법의 ‘내용’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 또는 규칙으로서 여전히 지속적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것 아닌가요?
[답변] 율법의 형식과 내용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법’으로서는 폐지되었지만, ‘내용’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어떤 것인지 그 본질을 잘 모르시는 분이 하는 주장임이 틀림없습니다.
먼저 “율법의 ‘내용’은 구속력이 있지만, ‘법’으로서는 구속력은 없다는 것은 모순에 불과합니다. 율법은 더 높은 분의 명령과 의지에 의해 제시되는 것입니다. 버제스, Vindiciae Legis (1646), pp. 214, 215. 율법은 거룩하신 입법자의 “명령”이자 “의지”입니다. 그 “명령”이자 “의지”인 율법에 불순종하고 거역하면, 단지 범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분을 거역하고 반역한 것입니다. 히브리어에는 반역으로서 죄라는 의미의 ‘페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율법의 ‘내용’이 가진 구속력과 ‘법’으로서 구속력을 구분하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인간의 법과 하나님의 법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람이 군주의 법을 어기더라도 그의 인격은 모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모욕하면 그 율법의 제정자이신 하나님의 ‘존엄’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존엄’과 하나님의 ‘율법’은 사실상 하나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테일러, Regula Vitae (1631), p. 233.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그릇 행하였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렘 34:16). ‘내 이름을 더럽혔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모욕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가진 ‘법’적 구속력과 ‘내용’이 가진 권위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어이쿠~ 미안합니다.”하면 될까요? 해당하는 죄에 대한 형벌이 주어지고, 배상이 명령될 것입니다. ‘법으로서 구속력’이 없는 율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율법의 의무를 파괴한다면 당신은 [주권자의] 율법을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시쥑, Antinomianisme Anatomized (1643), p. 12. “그리스도인은 이제 자유하게 되었으니”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지, ‘순종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닙니다.
[질문7] 율법이 여전히 양심을 구속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면, 율법이 가진 구속력은 거듭나지 않은 부분에서만 그런 것 아닐까요? 거듭난 부분에서는 율법에서 자유한 것 아닐까요?
[대답]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났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그리고 ‘어떻게 거듭난 그가, 또는 속사람으로는 율법을 즐거워 하면서, 그것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그것이 무엇이든 “사악함죄에 복종하는 것불순종은…곧 거듭나지 않았다는 표시가 될 것입니다.” 블레이크, Vindiciae Foederis (1653), p. 57. 반쯤 거듭나는 것이나 반쯤 결혼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질문8]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주셨고, 우리는 그것이 방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 되지 않나요? 복음은 명령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나요?
[대답]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다고 말씀했고(아 8:6),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말씀했고(요일 4:18), 바울은 죄와 피 흘리기까지라도 싸우라고 권면합니다(히 12:4). 또한 ‘그리스도의 강권하는 사랑(고후 5:14)은 설득할 뿐 아니라 더 강력한 책임으로 명령합니다.’ 러더포드, 1648, p. 122. 그리스도의 사랑은 유약한 내적 감정이 아니라,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사로잡는 강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고, “죄의 지배력으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양심으로부터 그 자신을 해방시키려하는…관념주의자들Notionist 근거 없는 개념을 가진 사람”의 편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홉킨스, Sermon on John, (1701), VII:239.
[질문9]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율법에 따라 행하고 있으니, 율법을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의 측면에서 자유롭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대답] 질문자의 생각이 조금 바뀐 것인지, 아니면 더 구체화된 것인지, 일관성이 없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누구를, 무엇에서 온전케 한다는 말씀입니까?
바로 다음 부분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죄인”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에서 온전케 한다는 것입니다(히 12:4). ‘율법을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주장입니다. “율법은…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묻게 합니다.” 볼튼, True Bounds (1656), p. 98.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은혜로 입게 된 흰옷이니, 더 소중하게 여기고, 더 조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질문자는 ‘의무의 측면에서 자유’를 말씀하셨지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죄와 의무는 반대 개념입니다. 죄는 반역이고, 의무는 충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나, 죄와 반대인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에임스, Epistles of Peter (1641), p. 59. 왜냐하면 “순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죄의 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테일러, Regula Vitae (1631), p. 213. 오히려 모두가 인정하는 바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부터의 지유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불순종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테일러, p. 165.
[질문10] 율법이 법으로 존재한다면 당연히 상/벌이 있겠지요. 그러면 불가피하게 율법을 ‘법’으로서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인데, 누구나 부담스러워할 것 같은 데요?
[대답] 바울은 구약에 예언된 ‘마음이 새겨지는 하나님의 법’의 언약을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마음에 새겨진 법’은 ‘외적인 측면’과 ‘내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외적으로는 “그분의 명령”이기 때문에프레스톤, Breastplate (1630), p. 153., 통고가 아니라 ‘선한 행위’를 하라는 강한 책임을 지시하는 명령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법은 내적으로 볼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서 “그의 동기”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백스터, Directions (1669), p. 58. 하나님의 의지와 그의 의지가 같아진 것입니다. 사입스, Demand of a Good Conscience (1640), pp. 195, 212. 부담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기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