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의 대한 만족[믿음]을 상실한 질병

탐심. 탐심은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과 만족을 잃으면 사람은 다른 것에서 만족을 얻고자 한다. 그 상태는 탐심이라고 하는 질병으로 나타난다. 죄의 목록에서 탐심은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이 친히 십계명에도 기록하실 정도로 탐심은 중요한 문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출애굽기 20:17). 왜 하나님은 탐심을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것일까?

탐심은 사람이 무언가를 지나치게 욕망해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만족감을 상실함으로 나타나는 부작용이요 질병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의 반대가 탐심이다. 하나님에 대한 만족이 증가하면 탐심은 줄어든다. 그러나 탐심이 증가하면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은 점차 사라진다. 바울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했는데 옳은 말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로새서 3:5).

왜 탐심이 우상숭배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의 자리에 탐심이 약속하는 죄의 쾌락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은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출애굽기 20:3)이다. 열째 계명은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출애굽기 20:17)이다. 두 계명이 동일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계명이 하나님을 최고의 선과 가치로 삼는 일을 사람의 탐심이 위협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십계명의 한 가운데에 안식일 계명이 있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고 즐거움을 그분에게서 찾아야 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첫째 계명과 열째 계명이 십계명을 성채처럼 지키고 있다. 안식일 계명이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 붙들어 탐심의 우상 숭배를 경계하고 있다. 하나님을 찬송함의 이유인 넷째 계명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애굽기 2:8-10).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즐거워해야하는 이유는 넷째 계명인 안식일 계명 안에 기록되어 있다. 안식일은 영원의 시간까지 하나님은 사람을 기뻐하고 사람은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행복을 누린다는 불변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이사야 66:22-23). 

안식일 계명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가치와 선과 즐거움을 누리라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만족함을 누리라는 것이다. 그분에게 마땅히 드릴 경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천지창조부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불변하는 진리다. 첫째 계명과 열째 계명이 울타리가 되어 안식일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이 안식일 계명에 있다.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그것이 탐심이 설자리를 근본부터 없앤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채우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항상 만족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갈함을 만족시켜주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예수님 안에서 만족하는 것, 그것이 믿음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이 말한믿음의 선한 싸움”(디모데전서 6:12)은 무엇인가?

예수님 안에서 만족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예수님에 대한 즐거움을 유지하는 싸움이다.

 

2.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립보서 4:11-12).

바울은 감옥에 있었다. 그런데도 어떻게자족 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바울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는 탐심이 자리할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과 인간의 탐심을 비교라도 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그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밝히고 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빌립보서 4:10-11).

바울은 그의 기쁨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는주 안에서기뻐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탐심 때문에 후원을 받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크게 기뻐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 즉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바울처럼 고난을 많이 겪었던 종교 개혁가 말틴 루터는 말한다. “우리는믿음으로신뢰하는 대상에게 최상의 존경과 경외하는 마음을 돌린다. 믿음은 그분이 의지할 만하고 고귀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Merrill Tenney, John: The Gospel of Belief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48).

바울은 말한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여기서 말하는모든 것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다. “비천, 풍부, 궁핍, 배고픔, 배부름, 질병, 고난, 죽음등 인생사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의지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립보서 4:19).

생각해 보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깊이 느끼는 바울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풍성함은 사람이 규모를 헤아릴 수 없는 풍성함이다. 하나님께 가장 어려운 일은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주시는 일이었다. 만약 사람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그 정도라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사람의 유익을 위해 아끼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로마서 8:32).

바울의 자족함과 성도들의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만족했다. 그의 모든 기쁨과 사랑은 하나님을 만족함에서 흘러나왔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 사이에 탐심이란 존재할 수 없다.

탐심은 예수님께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므로 믿음의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예수님 외의 다른 우물에서 갈증을 채우려는 마음이 탐심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예레미야 2:13).

터진 웅덩이에서 마시고자 하는 것은 결코 만족을 줄 수 없는 웅덩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3. 성경은 탐심을 끊임없이 경고한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도서 5:10).

탐심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 탐심은 사람에게 만족을 주겠다고 속삭이며 속인다. 언제까지 속을 것인가?

탐심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싹을 트는 것도 질식시켜 죽여 버린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기운을 막는 가시 같은 마음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더라”(마가복음 4:7).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은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4:19) 라고 예수님은 해석하셨다. 말씀이 마음에 떨어질 때 세상의 다른 것들에 대한 열망과 탐심이 너무 강해 말씀을 철저히 봉쇄해서 질식시킨다.

사람을 구원하는 말씀이 질식을 당한다니 탐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거기서 멈추지 않는 본질을 탐심이 지녔다. 탐심은 죄의 사육장이다. 바울은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고 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욥은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했지 돈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나님과 돈이 대등할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도 오히려 돈을 사랑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멸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세속의 물결이 참으로 거세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탐심을 능가하지 않으면 생기는 대참사이다.

탐심은 사람을 속이다가 마침내 자신의 민낯을 드러낸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브리서 9:27). 죽음을 앞에 두고 있을 때 탐심으로 쌓아올린 모든 것은 허망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탐심이 민낯을 드러낼 때는 소망과 참 위로가 가장 필요한 그 순간이다. 탐심은 사람을 결코 구원하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디모데전서 6:7). 탐심이 참으로 위험한 것은 그것이 영혼을 영원히 멸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말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디모데전서 6:9).

사람을 멸망으로 이끄는 탐심. 성경이 왜 탐심을 중요한 문제로 다루는지 알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만족의 상실로 인한 탐심은 죄의 자궁에서 탄생하는 악의 자식이다. 악의 자식은 자라나 영혼을 집어삼킨다. 탐심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에 대한 아름다움과 가치와 기쁨이 탐심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탐심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을 때에만 가능하다. 죄의 민낯인 십자가의 처참함을 가슴 아파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게 될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탐심을 제거하시고 탐심은 마침내 수명을 다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