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으로 인하여 다시 태어난 환희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스승이었으며 산헤드린 회원이었다. 세월의 서리에 머리는 검은 색을 잃어가고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어느 날 그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니고데모는 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까?
그는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스승으로 30대 초반의 예수를 찾아가는 것이 창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심각한 영적 결핍으로 온 영혼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을 철저히 지켜 구원받는다는 유대교는 그에게 쉼을 주지 못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 스스로 설 자신이 없었다. 그의 영혼의 상태는 문둥병자가 비단 옷을 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율법은 그를 치유하지도 구원하지도 못했다.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니고데모 같은 사람들이 도착하는 종착점은 무기력함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을 찾은 것은 그의 생애에 가장 잘한 선택이요 최고의 결단이었지만 그를 예수님께 이끈 것은 그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남겼었던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불안한 육신의 눈을 통해 그의 영혼이 태풍 앞에 촛불처럼 흔들림을 동정하셨다. 그의 갈구를 깊이 헤아리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흔들리는 영혼의 불안을 숨기고 있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보통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을 갈 수 없다.” 이것보다 심각한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니고데모는 답을 들었으나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설명해 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한복음 3:5-8).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남의 필요성도,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도 모르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이스라엘의 스승이었다. 영적 소경은 육적으로 눈은 떴으나 진정으로 소경이다.
2. 왜 다시 태어나야 하는가?
바울은 사람이 다시 태어남, 즉 거듭남의 필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디도서 3:3).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 대한 묘사이다. 바울은 자신이 거듭나기 전에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람이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이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거듭나야 하는 이유다.
바울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에베소서 2:3-5).
바울은 “허물로 죽은 우리”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죽어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육으로 불리며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상태로 태어난다. 육으로 태어난 사람은 육적인 일만 할 수밖에 없다. 육적인 일을 하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죽어 있다. 육의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지도 못하고 맛보지도 못한다. 육의 사람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적 능력에 관한한 죽었다.
요한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한복음 3:6) 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신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죽은 것은 시간이 갈수록 썩어지고 악취를 풍기게 된다. 그리고 소멸한다. 이것이 육의 사람의 일생이며 운명이다.
육의 운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영적으로 죽은 본질을 지닌 육의 사람은 스스로 육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외부에서 생명이 부여되지 않으면 스스로 영적인 감각이 깨어날 수 없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한 이유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외부에서 성령 하나님의 감화 감동하심으로 사람은 영적 생명을 부여받고 영적으로 태어나며 영적 감각이 살아난다. 영적인 삶이 시작된다. 전적인 성령의 사역이다. 거듭남이다.
3. 물(씻음)과 성령으로 거듭나다
바울은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5) 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생 즉, 거듭남은 일종의 씻음이다. 새롭게 하심이다.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요한복음 3:4)라고 묻자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5).
니고데모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요한복음 3:9)라고 반문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책망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3:10).
예수님은 왜 그를 꾸지람하셨을까?
그것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그럼에도 거듭남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에스겔 36:25-27).
하나님은 “맑은 물로 정결하게 하시고 모든 더러운 것에서 정결하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모든 죄를 씻음 받는 것은 거듭남의 사건이다. 옛 삶은 죽고 새 삶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씻어 부활로 출발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성령)을 “우리 속에 두어 부드러운 새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행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거듭남으로 모든 죄를 씻음 받고 성령의 역사로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은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 하나님의 ‘기쁨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즐거움의 화목이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인 율법의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힐 것이다.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즐거워하지 않았던 사람이 하나님이 최고의 선이 되고 가치가 되며 최고의 기쁨이 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사역이며 거듭남의 본질이다.
4. 거듭남의 근원은 어디인가?
바울은 왜 거듭남이 일어나는지 그 근원을 밝히고 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4-5).
거듭남의 근원은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다. 우리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이다. 그 자비와 사랑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그저 어느 정도가 아니라 지극히 풍성하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4-7).
우리의 거듭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 때문이다. 그 풍성함은 창세 전에 죽음을 당하신 십자가의 다함없는 사랑이 시공간을 뒤덮고 인류에게 몰려오는 무한한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충만함이다.
바울은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하심”이라고 했다. 구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만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 되어 인간의 역사 속에 나타나시어 십자가에서 우리의 육적 사람과 함께 죽으셨다. 그리고 사망에서 우리를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에베소서 2:6) 구주이시다.
거듭남이 선물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람의 죄를 대신 속량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 옛 삶도 함께 죽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했다. 그것을 믿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 성령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 성령 안에서 영화까지도 약속되어 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로마서 8:30).
“영화롭게 하셨나이다.”라고 완료형으로 쓰고 있다.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은 영화의 완료를 바라보고 약속한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었다고 이미 완성된 사건으로 기록한 것은 그것이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사역은 실패가 없다. 창세 전부터 영원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가?
찬양이 마음 깊숙이에서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