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완전해야 구원을 받는가?

재림을 맞이할 사람은 완전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완전해야 한다고 답변하면 과연 몇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볼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만일 불완전해도 된다고 하면 과연 불완전한 사람이 재림을 맞이하고 승천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천국은 불완전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불완전한 곳이란 말인가?

성경 말씀을 보면 재림(Parousia)을 맞이할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다. 그분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은 높다. 예수께서도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48)”고 말씀하셨고 바울도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고 기원하였다. 영생을 얻는 조건은 지금도 옛날 에덴동산에서 우리의 시조가 타락하기 전과 똑같다.

 

2. 완전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재림을 맞이할 사람은 완전해야 하는가? 그렇다. 완전해야 한다. 위의 성경 말씀을 보면 구원받는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완전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과연 완전한 사람인가하는 문제가 생긴다

제일 먼저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완전은 도덕적 완전이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품성이 좋고, 경건하며, 죄를 짓지 않는 완전히 성화된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상태에 이르지 못한 것을 알기 때문에 구원에 자신이 없고 재림을 기다리지 못한다. 그리고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꼭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은 첫째로 누가 완전하다고 선언하시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고상한 표준을 정하고 찬양하거나 비난해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완전하다고 인정하시는 분이 누구냐가 문제다. 두 번째는 그분은 무엇을 완전하다고 보시는가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는 아무리 논쟁을 벌여도 완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간의  구원을 선언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렇다면 그분은 어떤 사람에게 구원을 약속하셨는가?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뽕나무 위에 올라가 떨며 숨어 있는 세리장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언하셨다( 19:9).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옆에 달려 있는 뻔뻔스러운 강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셨다( 23:43). 그러나 니고데모 같이 잘 준비된 도덕적인 사람에게는 오히려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3:7)”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해서 세상이 멸시하는 죄인들은 완전하다고 인정되어 구원이 선언되고 니고데모 같은 잘 갖추어진 선생은 거듭나라는 권면을 받아야 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하고는 완전에 대해 다른 기준을 가지고 계심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삭개오나 십자가상의 강도가 구원받는 장면을 보고 매우 놀라며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는가 의아해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죄인들에게 구원이 선언될 때마다 거기에 십자가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무 속에 숨어 있는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언하실 때는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이었다.  예수께서는 지금 돌아가시기 위하여 여리고를 통과하고 계셨다. 삭개오의 집을 지나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그 주일 금요일에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흉악한 강도에게 구원을 약속하실 때 그 분은 십자가에 달려 계셨다. 영접하는 자를 완전케 하실 수 있는 십자가의 피가 거기에 있었다

누가 우리를 완전하다고 하시는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시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완전하다고 하시는가? 십자가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를 완전케 만드는가?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를 완전케 한다. 따라서 십자가 없는 모든 완전에 대한 논쟁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들은 특수한 장소나 특별한 사람이 있는 곳에만 확실한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십자가가 어디 특별한 장소에만 있다는 말인가? 십자가가 어디 특수한 사람만의 전유물인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한 바울의 외침이 귀에 쟁쟁하지 않는가?

죄인이 의롭다 함을 얻고 완전하다고 선언된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누가복음 18 14절에서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하나의 큰 충격이었다. 로마서 4 5절에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것을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기별은 그 당시 유대인들을 경악케 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가인의 충격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정성 들여 준비한 가인의 제사는 본 척도 안하시고 피흘리는 어린양 한 마리 올려놓은 아벨의 제사는 완전히 받아 주실 수 있다는 것인가? 가인은 자기의 제사에는 십자가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혹은 알면서도 그것을 무시했다. 자기의 정성이, 자기의 의가, 자기의 준비가 어린양의 피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것은 전적인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들에게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12:2)”고 권면하고 있다. 거기에만 완전이 있기 때문이다.

 

3. 표준이 높은 사람들의 위험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에 대한 높은 표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표준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표준이 높고 고상해도 그 표준이 십자가를 가릴 때에는 문제가 생긴다.  표준을 높이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그 표준에 이르지 못하는 자기를 바라보기 쉽다. 자연히 낙망이 되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게 된다. 그리고는 나보다도 못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위로를 받고 보상받으려 한다. 다른 사람의 흠이 크면 클수록 위로와 안도감은 배가된다. 그래서 결국은 남의 잘못과 결점을 날카롭게 찾아내어 비난함으로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려 하는 잘못에 빠지기 쉽다. 이것이 표준이 높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재림을 맞이할 사람은 완전해야 한다. 표준도 높아야 한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완전은 어떤 사람이나 장소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성화나 경건의 정도에 따라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완전은 오직 십자가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얻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와 기쁨으로 재림을 기다린다. 그날 완전한 사람을 호명하실 때 우리도 그 완전하다고 선언하시는 피뿌림의 무리 중에 있을 것을 믿으면서 오늘도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4:16)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드리는 이 말씀에 대하여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성화경건은 매우 중요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모든 성도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신앙이다. 그런데, 그러한 성장은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는 과정에서 사람이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이란, 그리스도의 완전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불완전에서 완전으로가 아니라, 완전에서 완전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말한다. 식물의 성장과정에서 매 단계마다 그 단계에서의 완전한 상태가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