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21]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아무리 성령에 민감한 사람이라도, 알지 못하고 범죄할 수 있잖아요.
[답변]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주의하여” 정확하게 살펴보고, 실행해야 합니다. 율법은 자신을 비추는 거룩한 거울이며 렌즈입니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 계시입니다. “만약 그가 자기 주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까’”볼, Power of Godliness (1657), p. 65.
한편, 무지가 책무를 해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알든지 알지 못하든지, 그것은 여전히 우리를 구속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율법을 행할 의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율법을 알지 못할 때는, 그것에 대해 무지하지 않고 그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할 그 이상의 의무가 있습니다.”퍼킨스, Of Conscience (1593), p. 622. 심판의 날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변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질문22]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고,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순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답변] 먼저는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지 않나요” 라고 질문하셨지요? 같은 질문을 하신 겁니다. 앞 질문의 답변과 그것에 대한 답변을 다시 보면 좋을 듯합니다.
다만 중생, 거듭남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기를 권유합니다. ① 세상 사람들은 ‘새 사람이 되었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달라졌다는 의미이지만, ② 은혜 안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통치를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분의 통치. 따라서 은혜, 사랑, 믿음은 결코, 유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생 또는 거듭남을 인간적인 ‘결심’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에 굴복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전적인 방향 전환이고, 성화의 생애의 지속입니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라고 말씀하시며, 성령을 통하여 실제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엡 5:27)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능력이지, 순종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에게 주는 사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당신의 성령을 널리 감화시킬 것이며, 당신은 법[십계명]을 성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무디, Weighed and Wanting, 1898.
“완전한 순종”을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도우심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꽃이 기름으로 타오르듯이, 혹은 동물이 먹이를 먹고 살 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준수함으로 삽니다. 즉, 이 영적 삶, 이 은혜의 삶은 계명을 행함으로 지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하나님의 계명들의 길에서 벗어나 죄에 빠진 모든 동작은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의 동작과 같아서, 모든 동작이 죽음에 이르는 동작이 됩니다.”프레스톤, Sermons, “New Life” (1631), p. 53.
물고기가 물 안에서 살듯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율법 안에서 사는 것이 ‘완전’입니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벗어나면 살 수 없듯이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할 ‘완전한’ 순종을 부정하는 것은 그가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클락슨, Justification, in Works (1864-65) 1:297.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순종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반쯤 죽고 반쯤 산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동일한 의미로 바울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엡 4:22)고 명령했을 때, 반쯤 벗어버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벗어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신자는 그런 욕심에서 완전히 죽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것은 롬 6:2~11; 7:4; 갈 2:19, 20; 6:14과 같은 구절들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룹니다. J.A. 벵겔, 영역 1857, Gnomon of the New Testament, III:86, 87.
[질문23]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완전하게 살 수 있겠어요? 완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 아닌가요? 그러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맞지 않나요? 결과적으로 같은 말씀 아닌가요?
[답변] ‘완전’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이해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완전’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 둘째는 ‘진실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시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1) 첫째, 완전을 구분하자면, ‘복음적 완전’이 있고, ‘절대적 완전’이 있습니다. 절대적 완전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땅으로 끌어내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적 완전’은 무엇일까요? 그 한 사례를 다윗을 통해 보게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죄를 지적할 때 그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라고 시인합니다. 이 장면은 여러 신하와 장군들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탄식과 슬픔으로 ‘나를 붙들어주시면’(시 51:12b),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13절)라고 간구합니다. 다윗에게 볼 수 있듯이 ‘복음적 완전’은 “우리의 실패에 대한 경건한 슬픔과 마음의 비탄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불완전한 성취들을 능히 받아주시리라 생각하면서” 순종하려는 “진실한 열망”과 “진지한 노력”을 동반합니다. 가우쥐, Principles of Christian Religion (1670), p. 228.
죄와 상관없이 살려는, 그의 명령에 순종하려는 이러한 ‘강렬한 반응’을 바울은 ‘죄와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며 싸우는 것’(히 12:4)으로, 로마시대 검투사를 빗대어 묘사했습니다. 죄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하는 것입니다. 완전은 자의적인 완전이 아닙니다. 그 완전은 “성경이 마음의 착실함과 참됨 그리고 진실함이라 생각하는, 부주의한 태만함이 없는” 완전이고 “그 완전에는 [성령께 굴복함으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습니다.”그린햄, Sweete Comfort for an Afflicted Conscience (1599), p. 134.
(2) 둘째, ‘완전’과 관련하여 말씀드리는 ‘진실함’은 ’주관적인 느낌‘이 아닙니다. 우리를 진실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굴복하고, 율법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완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요구된 진실함입니다. 완전과 관련하여 논의되는 진실함은 이런 것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위선 없음”, “착실함”, “성실함”, “일편단심”프레스톤, New Covenant (1629), pp. 2, 223-5., “무결함”로버츠, Of God’s Covenant… (1657), p. 489., 그리고 “하나님을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보다도] 사랑하는 것”백스터, 1743, p. 286.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충성됨’ 그것이 ‘진실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완전’으로 열납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에 사로잡혀 살면서, 짐짓 죄를 범하면서, 실수와 연약함과 허물이 여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내 마음을 하나님이 아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함’이 아니라 ‘자기기만’입니다.
[질문24] 하지만, 완전한 순종을 강조하는 것이 율법주의 아닌가요?
[답변] 이 질문은 “완전한 순종”을 무의식적으로 ‘칭의’와 연결시켜 놓았기 때문에 드는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된 신자는 “이제 더는, 결코, 그런 방식행위 언약의 방식으로 의와, 생명의 칭의를 모색하지 않습니다.”바이필드, Gospels Glory (1659) p. 36. 이것은 다른 모든 청교도 저자들의 견해이며(케빈, 193). 진실한 그리스도인 모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놀라운 은혜로 하늘 왕이신 분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고상함으로 율법의 순종이 이뤄질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하늘 왕가의 법도’인 셈입니다.
[질문25] 완전한 순종, 엄격한 순종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쁨이 있을까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종이 되므로 기쁨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요?
[답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명령한 율법에 대한 순종과 그 의무를 속박으로 여깁니다. 잘못된 편견이며, 매우 오래된 선입견입니다. 그 말은 뱀이 하와에게 했던 말과 완전히 동일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책임은 매우 엄한 복종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은 비록 ‘마음의 기꺼움’이라는 점에서는 ‘아들의 순종’이어야 하지만, [거룩한 입법자의 명령에 관해서는] 복종에 대한 엄한 책임이라는 점에서는 ‘종의 순종’입니다.”에임스, The Marrow of Sacred Divinity (1641), pp. 191, 195, 196.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본성적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저항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신 5:10)라고 친히 기록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계명”은 당연히 십계명입니다. “천 대까지”라는 말씀은 ‘영원히’ 그렇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삽니다. ‘아들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기쁘게, 그러나 엄숙하고 단호한 결의를 가지고 그분의 율법에 순종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다는 최고의 증거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휴즈, Dry Rod Blooming (1644), p.103. 그리고 그가 “그분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준수하는 이유”는 율법이 “하나님의 권위”이기 때문입니다.샤녹, Discourse on the Existence and Attribute of God (1682), p. 4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