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엇이 가장 확실한 재림의 징조인가?

무엇이 가장 확실한 재림의 징조인가?  바로 이것이라고 외칠 수 있는 마지막 징조는 무엇인가?  그때부터 정말 마지막의 카운트다운(countdown)이 시작되는 진짜 징조는 무엇인가? 그것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결정적인 징조를 알 수만 있다면 그때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재림을 준비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징조라는 것이 과연 그런 성격의 것일까?  재림의 징조를 외치는 수많은 설교들이 힘이 없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설교자 자신도 징조의 성격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근과 전쟁을 말하지만 기근과 전쟁이 없던 시대는 없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비참한 기근이 과거 시대에 많았다. 그리고 한국처럼 먹을 것이 풍부한 나라의 젊은 세대에게 기근은 먼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이야기로만 들릴 것이다. 지진도 점점 빈번해지고 강도가 심해지기는 하지만, 그래서 설교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징조이기도 하지만, 역시 직접 당해 보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세상은 평화스럽고 태양은 여전히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은 보이지 않고만물은 처음 창조한 때와 같이변함이 없다(벧후 3:4).

무엇이 가장 큰 재림의 징조인가? 예수께서는 재림 전 징조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유월절이 가까운 어느 날 감람산 기슭에서 제자들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파루시아(재림)와 세상 끝의 징조에 대해 물었다. 예수께서는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과 난리의 소문이 있을 것을 지적하셨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어도끝은 아직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24:6).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있겠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재난의 시작일 뿐이다”( 24:8)고 하셨다. 예수께서 이것이 있어야 끝이라고 제시하신 유일한 징조는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24:14)”.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장 확실하고 결정적인 재림의 징조이지만 복음 전파의 징조조차도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되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신약 시대에 바울은 이미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 15:19)하였다고 확신하였다. 19세기의 선교사들이 각 곳에 파견되고 곳곳에서 큰 신앙 부흥 운동이 일어날 때 복음은 땅끝까지 전파되어 마쳐지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날 기독교는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같은 제3세계에서 엄청난 증가를 보이고 있다. 기독교는 더 이상 백인의 종교가 아니고, 각 나라의 종교이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복음이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 24:14)” 되고 있다. 그러나 복음 전파는 양보다는 질적인 것이고, 점진적이어서 어느 한 순간 다 이루었다고 말하기가 힘든 것이다.

 

2. 징조의 기능

다시 우리는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무엇이 정말 가장 확실한 재림의 징조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경이 말해 주는 모든 징조 하나 하나가 다 확실한 재림의 징조이다. 자동차를 타고 여행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의 표시판을 보게 된다. 하나는 거리 표시판(Mile post)이다. 서울 30㎞라는 표시판을 보면 우리는 서울에 거의 다 왔으며 앞으로 30분 이내에 서울에 도착할 것을 알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또 하나는 방향 표시판이다. 서울이라는 표시가 있고 좌회전 화살표가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좌회전을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서울 표지판을 따라간다. 한참 달리다가 만일 엉뚱한 도시 이름이 나오면 우리는  당황해서 차를 세우고 주변을 살핀다. 만일 서울 표시가 계속 나오면 우리는 지금 올바른 길(right track)을 가고 있으며, 곧 서울에 도착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징조는 거리 표시판으로 주신 것이 아니고 재림이 가깝고도 확실하다는 방향 표시판이다. 방향 표시판이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면 목적지가 가까운 것처럼, 우리는 반복해서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는 징조들을 보고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안다. 각각의 표시들과 징조들은 우리가 드디어 목적지에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주며 우리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고 짐을 챙기고 머리를 매만지고 내릴 준비를 하게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어느 시대에서나 어느 정도의 성취를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 성경의 징조를 선택하신 이유이다. 베드로와 요한과 초대 교인들도 징조 때문에 다 자기들의 시대에 재림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 후의 신자들도 다 징조들을 보면서 자기들이 살아서 재림을 맞이하리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든 징조들이 있었음을 알면서도, 더욱 자주 그리고 크게 나타나는 징조의 빈번성과 중요성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오늘도 준비 속에 하루를 마감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징조에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모든 것을 걸어서는 안된다. 도로 표지판, 주변 풍경, 다른 도시의 이름들, 이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우리가 목적지가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모든 징조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재림을, 확실하고 그 임박함을 깨달으며, 죄를 회개하고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징조는 모두가 소중하며 나그네 길의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이정표이다. 이렇게 재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은 징조들에 의하여 지탱되고 생생한 기대감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어느 한 징조를 너무 크게 확대 해석하여 그것을 계산의 시발점으로 삼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것은 종말적 긴장의 균형을 깨버리고 기다림의 활력을 약화시킬 뿐이다.

그러면 이제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비유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3. 재림에 대한 비유 처녀의 비유 ( 25:1~13)

마태복음 25장에는 재림에 대한 세 비유가 나란히 나온다. 마태는 종말에 관심이 많았다. 마가는 13장에, 그리고 누가는 21장에 간단히 기록한 재림에 관한 기사를 마태는 24장과 25장에 걸쳐 가장 길고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 중에서도 25장에 나오는 종말에 관한 세 비유는 마태만이 독특하게 기록한 것으로서 재림을 기다리는 마태복음의 독자들에게 무엇인가 중요한 기별을 전달하고 싶어서 마태는 이 비유들을 그의 종말적 강화(Eschatological Discourse)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마지막에서 마태는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여 먹고 마시고 제멋대로 산 악한 종이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주인이 이르자 벌을 받고슬피 울며 이를 가는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열 처녀의 비유 끝에서 결론을 맺으며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25:12)고 하였다. 그러므로 열 처녀의 비유를 기록한 목적은 재림하실 시간을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는 것임이 분명하다.

열 명의 처녀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다섯 명은 미련하고, 다섯 명은 슬기롭다고 성경은 말하지만 사실 그들은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열 처녀가 다 신랑을 맞기 위하여 나갔다. 그들 모두가 다 등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다 신랑을 기다렸다. 신랑이 더디 오자 열 처녀 모두가 다 졸며 잤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다섯 명의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릇에 예비 기름을 담아 들고 등과 함께 가져갔고 미련한 처녀들은 그 예비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 뿐이었다. 왜 다섯 명의 처녀들은 그릇에 예비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아마도 신랑이 속히 올 것이기 때문에 여분의 기름이 없어도 등잔에 준비된 기름만으로도 충분히 신랑을 맞이할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신랑의 도착이 예상외로 늦어졌고 처녀들은 기다리다 못해 모두 잠이 들었다.

신랑이 온 것은 늦은 밤중이었다. 처녀들은 즉시 일어나 등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신랑이 속히 오리라고 확신하고 늦어질 것을 예상 못한 처녀들은 조는 동안에 이미 기름이 다 소모되어 자기들의 등불이 꺼져가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하였다. 신랑이 혹 늦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기름을 미리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그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였지만 그것은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구하려고 헤매는 동안 신랑은 도착하고 문은 닫히고 말았다. 여기서 신랑을 맞이하려고 기다리는 두 종류의 처녀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을 대표한다. 저들을 처녀라고 부른 것은 저희가 순결한 신앙을 지키노라고 공언하기 때문이다.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한다. 그리고 기름은 성령을 표상한다. 열 처녀는 이 세상 역사의 저녁에 신랑을 기다리고 있다.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한다. 모두가 초청을 받고 기름과 등을 가졌고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듯이 보이나 그 중 다섯은 준비가 되지 못하였다. 그 다섯은 놀라고 당황하여 문밖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열 처녀의 비유는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각 개인이 준비한 기름, 즉 성령의 준비는 결코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과보라 신랑이로다하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깨어서 기름을 준비하려고 하는 사람은 이미 때는 늦었다는 것, 그리고 성령의 기름을 계속 공급하지 않으면 등불도 언젠가는 꺼져 버린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늦게 올 것에 대한 준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두움이 깊어 가고 신랑은 아직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도, 그래서 피곤에 지쳐 잠시 졸고 있을 때라도 기름은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신랑은 처녀들이 기다리다 지쳐 졸기 알맞은 때에 왔다. 오늘날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열 처녀의 비유가 주는 이 교훈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의 재림은 혹시 늦어질지 모른다. 졸기 딱 알맞는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등불은 계속 타오르고 있어야 한다. 성령의 기름은 끊임없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신랑이 오실 때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4. 재림에 대한 비유 달란트의 비유( 24:14~30)

두 번째 비유도 첫 번째 비유와 같이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예증이다. 어떤 주인이 먼 타국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기고 떠났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두 달란트를 남겼지만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땅을 파고 그것을 묻어 두었다. 주인은 이익을 남긴 종들을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시켰지만, 주인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던 종은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듣고 어두운 데로 내어 쫓겨났다. 이 비유가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는 것일까?

주인이오랜 후에돌아왔다는 것은 주인의 오심이 지체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충성된 종들은 주인이 오랫동안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달란트를 자기를 위해 쓸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깨어 있었다. 그리고 주인을 위해 이익을 남겼다. 주인이 늦게 오는 것이 그들의 충성심을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았다. 주인에 대한 여러가지의 소문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들은 최선을 다해 그들이 맡은 달란트를 사용하여 주인을 위해 장사하여 이익을 남겼다.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말은 주인의 관심이, 종이 장사하여 얼마의 이익을 남겼는지 그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을 위해 일하는 신실함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기적인 종은 주인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자기 일에만 종사했다. 그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주의 재림을 영접하지 못할악하고 게으른 종이었다.

 

5. 재림에 대한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25:31~46)

마태복음 25:31-46의 기록은 심판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영광중에 보좌에 앉으신 인자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모든 민족을 두 무리로 나눈다. 이 비유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두 무리 가 모두 자기가 한 일과 주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특별한 자각이 없다는 점이다. 오른쪽의 무리는 자기들이 한 착한 행실에 대해 기억이 없고, 왼쪽의 무리는 자기들의 무관심하고 악한 행동이 주님께 끼친 영향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러한 행동들이 그들의 일상적인 삶이어서 특별한 자각을 느낄 수 없었다는 말이 된다.  오른쪽의 무리는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와서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거나 주님을 위해서 한 선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주님의 칭찬을 듣고 의아해 했다.      

이 비유에서 두 번째 확실한 점은, 재림하실 때 중간 그룹은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은 양과 염소로 갈라진다. 만일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분명히 중간 상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서 구원을 받기 때문에이것이냐 저것이냐만 있을 뿐이다.

세 번째 특기할 만한 사실은 주님께서복받을 자들이여내 아버지의 나라를 받으라”( 25:34)하고 구원과 상을 주신 이유가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고 봉사와 구제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인 봉사였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믿음과 행함은 사실 같은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갑자기 하나의 깨달음이 온다. “아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바로 이것이었구나!” 깨어 있으라는 말은 기도만 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었다. 동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든지, 시골에 은둔하여 성경 연구만 하라는 말씀도 아니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구체적인 봉사의 삶이었다. 주인이 기뻐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주인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충실한 청지기의 삶이었다.

네 번째로 우리가 크게 깨닫는 것은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 25:40)”이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며, 내 안에 그분을 모시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25:40의 말씀은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거절한 것이 곧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임을 가르쳐 준다.

마태복음 25장의 세 비유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재림시 칭찬 받을 무리들과 멸망당할 무리들로 뚜렷이 갈라지는데, 이 비유들에서 책망과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악한 악인이라기보다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있는 소극적인 사람들이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단지 기름을 예비로 준비하는 일에 태만하여서 쫓겨났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에 묻어 두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두움 가운데 쫓겨났다. 염소의 무리로 분류된 사람들도 악인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에 들어갔다. 깨어서 재림을 준비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께서 당부하신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실례들이다.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깨어서 예비하는 사람들이란, 재림이 혹시 늦어질지라도 당황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도록 넉넉한 기름(성령의 은혜)을 날마다 준비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깨어서 예비하는 사람들이란 주인이 혹 늦게 오실지라도 최선을 다해 오직 주인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깨어 있는 사람들이란 은둔자가 아니라 활동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주님을 영접하고 살기 때문에 주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문제가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