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회사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기독교계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다. 그는 건설 자재를 납품하는 회사를 운영하는 관계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납품할 회사의 어떤 사람을 룸살롱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자리에 앉더니 기도를 하더라는 것이다. 친구는 속으로 ‘이 사람은 향응이나 접대는 거절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이 사람은 향응과 접대를 더 바라고 즐기는 것이 아닌가! 후에 친구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참 헷갈리더라. 기도는 왜 하는 것이냐? 그가 받는 접대나 향응이 그리스도인의 기준으로 볼 때는 맞지 않을 텐데 말이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보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못하는 경우도 많더라.”
단편적인 예를 들었지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을 실망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는 뭐라고 기도를 하는 것일까? 값싼 은혜로 변질시켜 그리스도인이 지탄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값싼 은혜는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나치 독일의 폭정 하에서 저항했던 본회퍼 목사님은 유대인들이 끌려가는 데도 침묵하는 독일 기독교회를 신랄하게 비난하며 나치에 저항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이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의 용서, 싸구려의 위로, 싸구려의 성만찬을 양산한다. 그것은 대가나 값을 치르지 않고 받은 은혜다. 죄를 뉘우치지도 않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세상은 자신의 죄를 덮어 줄 싸구려 덮개를 싸구려 교회에서 얻는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 함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 함이다. 은혜가 홀로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 줄테니 모든 것이 케케묵은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말이다. 값싼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취한 은혜에 불과하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은혜에 불과하다.”
본회퍼의 사자후는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회를 질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값비싼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둔갑시켜 은혜가 모든 것을 덮어줄 것이라고 믿는 구원관은 얼마나 잘못된 가르침인가! 오늘날의 교회의 위기는 구원관의 위기다. 죄인을 의롭다함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함의 구원관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폄하시키고 있으니 슬프고 애통한 일이다.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이 얻는 성령의 열매는 성화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은 양의 가죽으로 그들을 옷 만들어 입히셨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가 인간 역사에 들어오셔서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입혀주시는 은혜로 사람을 구원하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을 ‘칭의’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사탄의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을 완전히 집어삼킬 수 없도록 둘 사이에 적의를 넣어주셨다. 하나님은 사탄을 상징하는 뱀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여자의 후손, 예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세기 3:15). 한글 성경에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라고 되어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I will put enmity(적의) between you and the woman.” 즉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적의를 넣어주겠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들에 대한 사탄의 적의는 불타오른다. 예수님의 값비싼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죄를 증오하게 된다. 죄를 증오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은혜가 죄를 사랑하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의 은혜는 죄를 슬퍼하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은 맹렬한 죄의 공격에 강력하게 저항한다. 칭의는 투쟁하는 성도를 만든다. 성화는 투쟁하는 성도에게 이루어진다. 성화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반드시 죄를 증오하는 성도를 만든다.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도 완전하고 순결해서 죄인을 온전히 구원하는 것을 사탄은 참을 수가 없다. 예수님과 사탄이 동지가 될 수 없듯이 선과 악이 우애를 나눌 수는 없다. 인간이 연약하여 넘어지고 쓰러질 수는 있다. 그러나 죄를 사랑할 수는 없다. 죄를 계속 탐닉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었다면 죄를 진심으로 슬퍼하고 회개한다.
바울은 회심한 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 9:2). 이것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증오하고 슬퍼하며 선을 위해 투쟁하는 삶이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것이다. 죄로부터 지키시는 성령의 은혜다.
구원받은 성도는 투쟁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베드로전서 5:7-8).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는데 깨어있기를 싫어하고 요행을 바란다면 결과는 분명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무슨 오해의 소지가 있는가? 시골의 초가집에 할머니 한 분이 사시면서 쓸고 닦고 소독하며 관리하면 그 초가집은수십 년이 지나도 견실하다. 백 년도 갈 수 있다. 그러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그 초가집은 몇 개월 만에 잡초가 자라고 곰팡이가 좀을 먹어 폐가가 되고 만다. 초가집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사람의 삶이랴!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선을 위해 투쟁하는 삶이다. 투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은혜는 죄인을 가리지만 죄를 덮는 담요는 아니다
요즘 너무나도 자주 교회 지도자들이 비리와 비행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일부 지극히 국한된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오늘날 교회 전반적인 현상은 예수님의 은혜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다운 성직자나 평신도를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어떻게 교회가 예수님의 은혜를 그렇게 값싸게 취급할 수 있는가? 어떻게 교회가 사회의 등불이 되고 도덕적으로 앞장을 설 수 있겠는가? 일각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세속화가 점점 교회 안에 밀려들어 오는 현실에 위기감을 느끼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목회자의 위기는 평신도의 위기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위기는 교회의 위기이고 대한민국의 위기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기독교의 영향력은 지대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 기독교는 값비싼 은혜에 감격한 기독교, 새벽을 깨웠던 기독교, 헌신에 인색하지 않았던 기독교이다. 어두운 사회에 횃불을 들었던 기독교이다.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했던 기독교이다. 겸손했던 기독교이다.
회개의 투쟁은 희망이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1-24).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사람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간절히 바라는 자들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새사람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바라지도 않는데, 간구하지도 않는데 하나님이 해주실 수는 없다. 그저 바란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미신이 주는 게으름이다.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 죄를 슬퍼함이 있어야 한다. 민족과 나라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야 한다. 값싼 은혜가 아니라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은혜를 받았음을 감사해야 한다. 그러면 결코 옛사람을 계속 입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새사람을 갈급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