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서 생명으로

지금은 50대 전후가 된 우리 아들들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우리 가정에 커다란 슬픔이 찾아들었다. 건강하게 환자들을 돌보며 생활하던 아내가 갑자기 관절 마디마디마다 부어오르고 열이 나고 통증이 생기면서 6개월 정도 지나는 동안에 손을 꼭 쥐지도 못하고 펴지도 못하게 되었으며, 혼자 일어서지도 못하고 일으켜주면 혼자서 앉지도 못하는 지경까지 점진적으로 병세가 악화되었다. 발병 초기부터 여러 차례 의사의 진단과 자문을 구하였으나 혈액검사나 다른 의학적 검사로는 뚜렷한 병명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저 심증으로 주변에서는 민간에서 쥐 매듭이라고 부르는 류마티스성 관절염이 아닌가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집안일이나 살림은 마음뿐이고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처지에서 남의 도움만 받고 살아가는 투병생활의 고통은 직접 당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괴로움과 아픔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1년 동안 외국에 유학을 다녀오라는 통보를 받고 매우 망설였으나 주변에서 열대지방에 가면 관절염 계통의 질병치료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권유하기도 하고 격려를 해 주기도하여 우리 다섯 식구는 필리핀 생활을 하게 되었다. 부축을 받으며 마닐라에 도착한 후 바로 아내는 그곳 마닐라에 있는 한 병원에 입원을 하였으며 2주일의 시간을 검사와 진단을 위하여 병원에서 보냈다. 서양의사 한분이 검사 결과를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면서 이 병은 류마티스 관절염이며 현대의학적인 치료는 어렵고 단지 해열제와 진통제를 사용하면서 증상만 완화시키는 일을 할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병원에 계속 있든지 아니면 집으로 가든지 형편에 따라 결정하라고 하였다. 

아내에게는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눈치를 챈 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행동하였다. 집에 와서 우리는 둘이서 손을 마주잡고 눈물만 쏟아내었다. 그리고 서로에게 마지막 말이라고 생각되는 몇 가지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나는 아내 걱정을 하면서 아무 걱정하지 말고 가장 편안하게 지내라고 하고 아내는 어린 자녀들 걱정을 하면서 자기가 죽으면 아이들을 위하여 곧바로 가정을 다시 세우고 살라고 부탁하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내를 다시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쳐 오르면서 돌파구를 찾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일 외에는 다른 희망이 없었다. 

대학 숙소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온천지역이 있었는데 매주 2~3회씩 정규적으로 온천장을 이용하였다. 평일에는 아침에 온천에 데려다 주고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데려오고 일요일에는 온 식구들이 하루 종일 같이 온천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시는 물은 코코넛 물을 자주 사용하였고 열대 과일들을 골고루 많이 먹었다. 바나나와 토마토 그리고 다른 야채들을 즐겨 먹었으며 햇볕을 받으면서 수영을 하고 야자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아내는 모처럼 주방일과 청소 등 가사에서 해방되어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는 이런 자연 친화적인 생활이 질병치료와 회복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를 알지 못하였다. 

5개월 정도가 지났을까 어느 날 온천장 안에서 거닐던 아내가 그의 손이 꼭 쥐어지고 펴진다고 소리쳤다. 너무 기뻐서 박수를 치면서 온천 밖으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10분쯤 지나니까 다시 손가락이 엉성하게 되었다. 또 다시 온천에 들어서서 10여분 정도 지나가니까 다시 손가락이 유연하게 되었다. 

온천의 원적외선 열, 적절한 운동, 햇볕의 자외선의 영향, 깨끗한 공기와 자연 건강식, 그리고 충분한 휴식과 감사와 기쁨이 있는 생활이 병든 몸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위대한 일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것이 뉴스타트 천연치료의 축복이었다. 약간의 굴곡은 있었으나 아내는 점진적으로 건강이 회복되기 시작하였고 그 후 37여년이 지난 지금은 아프기 전보다 훨씬 더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면 행복이 보인다

대학에서 같이 일하는 직원 중의 한 분에게서 어느 날 특별한 부탁이 왔다. 어느 40대 초반의 의사부인이 폐암말기인데 2-3개월 남은 삶을 그리스도인 가정에 머물면서 신앙적인 준비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 식구들이 의논을 하고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함께 살면서 지금까지 살아 온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되었다. 남편은 의사로 지방도시에서 개업을 하고 이제 막 새집도 마련하고 아이들과 함께 가족들이 재미나게 살만한데 폐암진단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오른쪽 폐암을 치료하기 위하여 서울소재 모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 등 의학적인 치료를 성실하게 받았으며 대체의학적인 방법들도 틈나는 대로 적용하였다. 안수기도도 받아보고 그래도 답답해서 굿도 해보고 굼벵이도 삶아먹고 뱀도 100마리 이상 먹었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기름기가 흐르는 그의 이마가 뱀 비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침내 더 이상의 치료에 대한 기대를 하지 못하게 되고 2-3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 자주 딸꾹질이 나고 손톱이 청색으로 바뀌면서 죽음의 징후가 하루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마지막 선택으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신앙생활로 마지막 순간들을 보내고 싶었다.  

우연히 천연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떤 모양으로라도 살 수만 있다면 더 살고 싶은 기대가 컸다. 자기도 천연치료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 문제는 통증이 너무 심하여 진통제를 달고 산다. 다른 약도 많아서 약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한주먹씩 먹는다. 천연치료는 우리 몸의 자생력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약은 방해가 된다고 했더니 약도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가지고 있는 모든 약을 나에게 주었다. 이렇게 천연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의 유치파인 천연치료병원에서 실행하는 정보를 따라 천연치료를 진행하였다. 처음 1주일 동안 첫날 물만 마시는 금식을 하고 그리고 포도즙과 당근과 토마토 등 과일과 야채 중심의 식사를 하면서 해독프로그램을 적용하였다. 점진적으로 단순성과 다양성의 원칙을 따라 채식위주의 정상식사를 하면서 영양을 균형 있게 공급하였으며 햇볕을 받으면서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숲속에서 심호흡을 하고 1주일에 5회 정도 구강체온을 39℃ 이상 올리는 1시간 가량의 전신찜질을 하였다. 여전히 통증은 심하여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10분이나 20분 정도 자다가 깨곤 했다. 하루 종일 잠자는 시간이 3~4시간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작스런 변화는 없었으나 우리는 서로 격려하면서 천연치료를 계속하였다. 견디기 힘든 찜질을 할 때는 기도로 힘을 얻고 온열치료가 계속되는 동안 찬양도 하고 성경도 읽어주면서 어려운 순간들을 잘 이겨내도록 했다. 날마다 땀을 많이 흘리는 찜질을 하는데도 피부에 접촉되는 수건에 하얀 물질들이 많이 묻어나왔다. 2주가 지나면서 손톱색갈이 어린아이 혈색으로 바꾸었고 얼굴도 화색이 돌았다. 식욕도 점점 좋아지고 통증은 줄지 않았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 분명하게 건강상태가 호전되고 있었다.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난 생애동안 가장 좋았던 일들을 하루에 10가지씩 적어가기로 했다. 저녁이 되면 지난 생애의 축복들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힘을 얻기도 했다. 이렇게 3개월이 지났다. 운동량도 많아졌고 걸음걸이도 아주 활발하게 되었다. 어느 날 금요일 저녁인데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면서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을 떨어뜨린 채로교수님, 제가 침례를 받아도 되겠습니까?”라고 입을 열었다. 너무 기쁜 순간이었다. 이런 제안이나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이런 표현을 한 뒤에 그날 밤 그는 우리 집에 와서 처음으로 통증이 없이 단잠을 잤다. 아침에 두 손을 힘껏 뻗치면서 단잠을 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준비된 어느 안식일 오후에 다른 환자와 함께 대학의 호수에서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감동적인 침례식을 가졌다. 

그 후 1개월이 지난 다음에 죽음을 예상하던 시간들을 훌쩍 넘기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여러 해를 더 살았다. 평생을 두고도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을 선택하면서 그는 자연을 만드신 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면 행복이 보인다!

우리 집은 그렇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가정형 요양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수년 동안 이런 일이 계속되었는데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은 이런 경험은 우리 가족들에게 커다란 축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