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에 의하면 생명은 자연적으로 발생하였고 자연은 유전자의 이기적인 생존본능으로 살아남으려 합니다. 이것을 믿으면 인생은 우연의 산물이고 삶은 투쟁의 연속이 됩니다. 그러나 자연이 과연 그럴까요?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자연 그대로의 세계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워집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그리움을 노래하며 시를 씁니다. 만일, 그것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고 있다면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들까요?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은 인종, 지역, 성별, 종교에 아무 차별 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비칩니다. 빛은 참 공평합니다. 경쟁과 독점이 아니라 공평한 분배입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이 열매를 맺으려면 햇빛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을 뿐만 아니라 흙으로부터 영양을 받아야 합니다. 흙이 식물에 영양을 공급하려면 그 속에 있는 무수한 박테리아들이 죽어 거름을 분해해 주어야 합니다. 식물은 그런 과정을 거쳐 힘들게 맺은 열매들을 사람과 짐승의 음식물로 공급해 줍니다. 이 모든 과정은 생존을 위한 이기적 투쟁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이타적 희생으로 진행됩니다.
물론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은 그들이 얼마나 싸우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동물의 왕국을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었을 때 그들이 서로 싸워 그 세계가 파괴된 적이 있나요? 먹이사슬이 지배한다고 하지만 그 나름의 질서 속에서 자연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초원이나 남미의 밀림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자연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오히려 최상의 상태로 안정된 생태계를 유지합니다. 혹 천재지변으로 파괴되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복원합니다. 자연이 그 자체의 질서와 복원력을 잃고 파괴되는 것은 인간이 이기심이 작동할 때뿐입니다. 그러니 자연은 자기만 살기 위해 이기적으로 투쟁하는 세계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기 위해 이타적으로 봉사한다는 세계관이 섭입관이나 편견 없이 더 정확히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 것이 아닐까요?
창조는 행복의 세계
성경은 죄로 인해 에덴의 행복을 상실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연에 하나님의 이타적 사랑이 남아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사 40:26)고 하며,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6:28)고 합니다. 이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롬 1:20) 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행복의 세계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매일의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구절로 마칩니다. 히브리어로 와야르 엘로힘 키–토브라고 합니다. 여기 ‘좋았더라’는 히브리어 토브는 정말 좋은 단어입니다. 같은 단어가 신명기 10장 13절에서 ‘행복’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에서 ‘행복’이 바로 토브입니다. 그러니 매일의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이 행복하시니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이루가면서 행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엿새가 마쳤을 때 토브 므오드 very good 심히 좋았습니다. 즉, 아주 행복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통해 당신이 체험하신 행복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셨다는 것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시간(時間)인 안식일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칠일에 안식하셨습니다. 즉 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1-3).”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은 피곤하여 쉬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지창조를 기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아담과 하와에게 진정 행복한 날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제 완성된 창조를 바라보며 놀람과 감탄과 감사로 가득 찬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는 가장 놀라운 환희는 피차 상대방이었기에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맞이한 제칠일은 경탄과 감격과 설렘과 놀람의 날이었습니다. 그들이 서로를 포함하여 완성된 창조를 바라보며 탄성을 내뱉던 그 날 그들의 가슴은 얼마나 큰 기쁨으로 충만하였을까요? 창조 주간의 제칠일은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맞을 때마다 히브리어로 ‘샤바트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이는 곧 ‘행복한 안식일’이란 뜻입니다.
행복한 공간(空間)인 에덴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첫 거주지의 이름이 ‘행복동’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에덴’의 문자적 의미가 ‘행복’ 혹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에덴동산을 ‘에덴의 낙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은 히브리어 성경을 최초로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이 창세기 2장 8절의 ‘동산’을 파라다이소스(παραδαισος)라고 번역하였고, 그 말에서 영어 Paradise 즉, 낙원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에덴동산’이란 곧 ‘행복의 낙원’이란 뜻입니다. 창조된 인간의 첫 거주지 이름이 ‘에덴’이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나타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인간이 머물게 된 공간의 본질입니다.
창세기 2장 15절은 창조주께서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다스리라’는 말은 통치권입니다. ‘지키라’는 말은 관리권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의 통치권과 관리권이 인간에게 부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권리의 범위와 한계도 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사람에게 에덴동산을 소유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권리는 청지기로서의 권리였습니다. 이 범위 안에서 그들은 에덴 즉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아름다운 수목으로 가득한 정원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동산 가운데에는 특별한 두 종류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이 두 나무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기본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마음껏 취하라고 허락하시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취하면 안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공의와 구별을 나타냅니다. 선악과 자체가 무슨 독이 있는 나쁜 열매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만 그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피조물임을 알려주는 표징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누리는 그들이지만 선악과 앞에 섰을 때 자신들이 에덴의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임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의 행복은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범죄 이후에 에덴동산은 ‘실낙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도 여전히 잃어버린 낙원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비록 곳곳에 죄와 타락의 오염이 나타나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자연은 여전히 인간을 행복하게 하며 기쁘게 해 주는 치유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촌 곳곳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곳에 들어가면 저절로 자연생태계의 영악한 생존경쟁이 아니라 평안한 휴식과 행복을 느끼며 에덴동산을 떠올립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에덴동산이 회복될 ‘복락원’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인간관계(人間關係)
하나님은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사람에게 가르치기 위해 한 가지 일을 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짐승들로 하여금 한 쌍씩 아담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면서 그들의 이름을 짓게 하는 일이었습니다(창세기 2:19-20).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반려와 동정에 대한 필요를 자각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지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은 인간으로 더불어 살 때에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이 천사와 산다하더라도 같은 인간이 없으면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는 것은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고민은 이 인간관계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반드시 사람들에 의해 상처받고, 사람들에 의해 괴로워합니다. 심각한 상황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아예 모든 인간관계를 기피하고 혼자 있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를 쌓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위 ‘외로운 늑대들’입니다. 이런 현상은 창조질서에서도 벗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다음 그가 혼자 있을 때에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창 2:18)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생존경쟁이 몰고 온 파괴적 결과입니다. 진화론적 생존경쟁의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이런 사람들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행한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세계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상생과 공존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고 살게 됩니다. 경쟁하기보다는 봉사하기를 선택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살리고 형제를 살게 하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하는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경쟁자가 아니라 ‘도움이 되는 친구’ 즉 동무(同務)나 동모(同謀)가 되고자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among) 있느니라”(눅 17:21)고 했습니다. 이 말은 천국이 사람의 마음에(in) 있다는 뜻보다는 인간관계 사이에(among) 있다는 뜻입니다.
세계관은 결국 선택의 문제
오늘날 진화론의 영향은 너무나 압도적입니다. 그것은 여러 면에서 우리 사회와 인간의 생활 및 행동 양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학, 경제학, 경영학, 행정학, 심리학, 교육학, 역사학, 인류학, 등 거의 모든 학문과 사상 영역, 심지어 신학에까지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런 영향력으로 진화론은 검증되고 확립된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세계관은 이성적 판단이 결여된 비지성적 이론처럼 매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진화론은 과학이고 창조론은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화론이 주장하는 생명과 존재의 기원 문제는 어차피 과학적 검증의 범위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론이 과학이 되려면 관찰을 통해 발견한 현상이 같은 조건에서 반복하여 나타나는지가 실험을 통해 검증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원의 문제는 현존하는 인간이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창조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화론은 과학’이란 표현에 대응하여 ‘창조과학’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도 바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사실은 과학으로 검증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계시로 기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원에 관한 진화론과 창조론의 입장을 정확히 비교하면 ‘인간의 추론’과 ‘성경의 계시’입니다. 이것은 모두 과학적 실험으로 검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국 선택의 문제입니다. 무엇이 더 신뢰할 만하며 무엇이 더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인지 판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생명과 존재의 ‘기원’이 검증범위 밖에 있다면 생명의 ‘과정’에 대한 관찰은 지금 있는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는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 믿는 대로 본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진화론을 믿고 세상을 보면 만물이 이기적으로 생존경쟁과 투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창조론을 믿고 세상을 보면 비록 죄의 흔적이 있지만 만물에는 여전히 상생과 공존을 위한 봉사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결국 ‘무엇을 믿느냐’가 ‘어떻게 볼 것인가’를 결정해 줍니다. 역시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우리의 삶도 경쟁이냐 봉사냐 불행이냐 행복이냐가 결정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