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계명: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20:3)

일대일 약속십계명 언약은 결혼 서약과 같습니다. 결혼 서약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대일 약속인 것처럼 십계명 언약은 인간 개인(“너는”)과 하나님(“나 외에는”) 사이의 일대일 약속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와 개인적으로 약속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신()도 좋은가? – 한 여 청년이 한 남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건강한 신체 외에는 가진 것이 별로 없는 가난하고 집안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딸의 장래를 염려한 부모의 반대가 매우 심하여 어려움을 겪었지만 여 청년은 부모의 핍박 속에서도 일편단심으로 남자 친구를 놓지 않았습니다. 결국 부모는 남자친구를 한번 데려와 보라고 말했습니다. 

부모 앞에 머리를 숙인 청년에게내 딸을 죽도록 사랑하고 사는 날 동안 고생시키지 않고 살 자신이 있는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청년이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글쎄요. 미래 일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면 딸을 줄 마음이 있겠습니까? 

최고의 배우자 선택신랑 되신 예수님과 언약 관계를 맺는 사람은 행복자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주님처럼 사랑이 깊고 신실한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증거 하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11:28).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7:23).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 45:5).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43:1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호소하십니다. “나보다 더 큰 지혜와 능력이 있는 존재가 있는지, 나처럼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을 백성에게 당신이 책임지실 것이라고 강력하게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택의 자유십계명의 첫 번째 언약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이 하나님께 가져야 할 믿음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강제로, 억지로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자원하여 스스로 선택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자신을 드려 온전히 헌신하신 것처럼 인간의 온전한 헌신을 기대하십니다. 시몬 베드로가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16)라고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믿음의 고백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개인의 구세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처럼, 첫 번째 언약은 하나님만을 개인의 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신학자가 다른 신을? – 미국에 한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많은 책을 저술한 박학다식한 학자였습니다. 한국의 한 신학 교수가 그 신학자의 서적과 논문들을 접하고 그의 지식의 넓고 깊음에 탄복하여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한국의 신학 교수는 미국에 가게 되었고 우연히 그 신학자와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존경하는 신학자를 만났을 때 안부 인사를 한다는 것이 엉겁결에교수님! 기도 많이 하고 계시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신학자는 안부 인사를 수학 문제 풀듯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기도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상은 합니다.” 명상은 하지만 기도는 안 한다니 무슨 의미입니까?

이분은 예수님과 성경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본주의적이고 종교 다원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신학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힌두교나 불교 등 다른 종교에서 하는 것처럼 명상과 같은 종류의 기도는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와 하나님의 절대성,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시대의 다른 신이러한 경우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을 의지하다가 실망할 것을 아시고 주님은 우리에게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10:37).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하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자녀를 의지하다가 실망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복이 있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오늘날은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합니다. 미국의 미래학자 커즈와일은 인간보다 뛰어난인공지능 인간(Posthuman)’의 출현을 예고했습니다. ‘인공지능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는 우려 섞인 예측도 나옵니다. 2015, 한국의 바둑 왕 이세돌이 인공지능알파고에게 14로 패하는 대국을 지켜보며 우리 인간들은 모두 경악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앞선 인공지능알파고 제로의 탄생으로 인간이 백전백패할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 기술을 추앙하며 하나님을 경시하는 오늘날의 세상을 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더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다른 신을 두는 것이 됨을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첫 번째 언약의 발효 조건은 하나님의 절대적 유일성을 믿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을 위해)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로 귀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또한 절대적 신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성인 중의 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성경에 예언된 구세주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실까요? 하나님도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인간처럼 이기적이고 편협한 분이신가요? 아니면 자기중심적인 분이신가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른 신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많이 두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이 고안하고 만들어 낸 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신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항변하나님은 거짓 신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으면서 인간의 생명과 축복을 주시는 참 하나님은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항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46:5, 9).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만드는 신들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는, 나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분이며 그분의 말씀이 절대적이며 그분은 나의 생명을 창조한 분으로서 나의 생명보다 그분의 존재와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직장 때문에, 자녀들 때문에, 재정 문제 때문에, 혹은 인간 관계 때문에, 그 외에 여러 가지 인간적인 문제들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거나 신앙을 포기한다면, 그것이 곧 다신 신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직장신, 자식신, 금전신 등 많은 신들을 만들어 그것들을 섬기며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 신을 멀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기로 선택했다면, 죽음까지도 초월하여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계명: 우상을 만들어 거짓 예배드리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20:4)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첫째 계명은하나님은 누구이신가를 설명하고, 둘째 계명은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첫째 계명은 거짓 신들을 금지하고 있고, 둘째 계명은 거짓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십계명의 첫 단계에서 하나님을 신으로 선택했다면 둘째 단계에서는 선택한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방법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둘째 계명은 예배하는 자들이 받을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 예배자가 금해야 할 것을 제시합니다. “둘째 계명은 우상이나 그와 비슷한 가지고 경배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많은 이교의 민족들은 그들의 우상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표상이나 상징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예배는 죄가 된다고 선언하셨다”(PP, 306). 

우상을 만드는 이유사람들은 왜 우상을 만들었을까요? 우상은 신을 숭배하고 예배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절대자()를 의지하고 싶은 본능이 있고, 그 신을 어떤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무엇인가 보이는 신을 섬기고 싶어서 광야에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던 불행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우상 숭배가 어리석은 이유는 우상은 다만 인간 기술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며 사람보다 열등하고 사람을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참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부숴뜨리우리라”( 8:4~6).

동남아 지역에서는 아직도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서 있고 거기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46:5~7). 국민의 다수는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어도 우상을 위하여, 종교적 의식에 재정을 허비함으로 더욱 가난해지는 반면 우상을 만들거나 종교 관련 물품을 파는 소수의 사람들은 부유하게 사는 모습을 봅니다.

우상을 금하는 이유하나님은 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물질의 본질적인 특성이나 인간적인 한계에 매여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 17:29)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만물의 형상대로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잘못 나타내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존귀함을 우상의 종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1:23).

하나님이 원치 않는 예배때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 이사야서에서는 이런 예배를마당만 밟는예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11~12). 이스라엘은 수많은 제물을 가져와서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를 드렸는데 주님은 말씀하기를 마당만 밟고 갔을 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예배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자기 방법대로 섬기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하나님을 자기의 생각과 경험과 방법으로 판단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강제로, 억지로, 두려움으로, 고행하듯이, ‘보여주기식의 예배를 드리거나 하나님을 무서운 분이나 인간처럼 제물을 좋아하는 분으로 잘못 알고 예배를 드리는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진정한 예배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대의 태도와 행동을 통해 사랑을 느끼고 압니다. 하나님도 우리 예배자의 마음과 태도와 행동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아십니다. 주님은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4:24)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둘째 계명은 진정한 예배자는내 계명을지키는 자곧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참예배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요약인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잘 따르는 자요 또한 참예배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예배에만 열심이라면 교회에서는 예배자의 모습이지만 생활에서는 예배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를 드리다가 형제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생각나거든 돌아가서 화해하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20:6)는 말씀을 늘 기억합시다.

 

셋째 계명: 하나님 공경의 축복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 20:7)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셋째 계명의 핵심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든 경우에 헛되이, 쓸데없이, 함부로 부르거나 사용하는 것을 금하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거짓 서약과 일반적인 맹세를 금할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존엄한 뜻을 생각지 않고 경솔하고 부주의한 태도로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금하고 있다. 보통의 대화에서 부주의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일과 사소한 문제로 그분께 호소하는 일과 그분의 이름을 자주 생각 없이 되풀이하는 일로 우리는 그분께 욕을 돌린다”(PP, 307). 우리는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111:9)라는 말씀을 숙고해야 합니다.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입 밖에 낼 때에는 존경과 엄숙한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품성, 속성, 인격의 총체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게 될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으면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잘못 말하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애굽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3:13)라고 질문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대면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으며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마음과 태도우리는 예배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찬송하고 기도드릴 때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존귀한 마음과 태도로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창조주와 구세주로서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찬송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또한 구세주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대화의 시간인 기도 중에 그분의 이름을 가장 많이 부르게 됩니다. 기도할 때에는 겸손과 신뢰의 마음으로 그분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 없이 부르는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15:8~9).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예배 중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일상 대화 중에는 교회나 지도자들에 대해 비평의 말을 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됩니다. 언제든지 어떤 장소에서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증거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엄격히 준행하기 위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적극적인 준수는 법을 어길까 두려워서 하나님의 이름을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그 의미에 맞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땅끝까지 가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복음 전도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선포적 복음 전도와 참여적 복음 전도입니다. 화틀리(Whately)만약 우리의 종교가 틀렸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선전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선포적 복음 전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중 앞이나 개인에게 말로써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행실로 증거 참여적 복음 전도란 교회가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에 단순히 참여함으로써 끼치는 비언어적 증거를 말합니다. 즉 종교는 좋은 향기가 풍겨서 그것의 존재를 알리는 백합화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도 방법은 하나님에 대해서 한마디도 꺼내지 않지만 백합화의 향기처럼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복음을 말로 꺼내기 전에 사람들이 다가와당신은 그리스도인이세요?” 하고 물어보게 하는 것입니다. 

선포적 복음 전도든 참여적 복음 전도든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태도와 행동입니다. 말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우리의 태도와 행동입니다. 우리의 말보다 친절, 배려, 용서, 정직, 명랑, 사랑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잘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감사와 희망의 말을 많이 사용하고, 친절과 배려의 마음을 보여 주고, 너그럽고 포용하는 봉사의 삶을 산다면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증인이 될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라고 말하는 것보다 정직하게 사는 삶이 더 큰 영향력이 있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행동이나 삶의 모본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더 세상에 알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6:46). 이 말씀을 읽으면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친절한 말과 예의바른 태도로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도 하고, 불친절한 말과 무례한 태도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잘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시다. 

 

넷째 계명: 안식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 20:8~11)

개혁사업의 중심 : 안식일 이스라엘은 율법의 백성이라고 할 만큼 율법을 중요시했습니다. 율법 중에서도 가장 강조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이스라엘이 퇴락의 길을 걸었을 때는 율법과 안식일을 소홀히 한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개혁을 통해 나라가 회복될 때는 율법과 안식일 회복 사업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이사야 58장에 예언된 회복 사업에도 율법과 안식일 회복이 그 중심에 있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58:13~14). 오늘날 성경을 중심으로 신앙을 하고 있는 개신교에도 안식일 회복 사업이 필요합니다. 

강력한 요구안식일(샤바트)쉬다, 중단하다라는 뜻입니다. ‘정상적인 활동을 중단하기 위한 날’, ‘특별히 정해진 날을 뜻하며, 구약 성경에서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정상적인 일상생활의 과정을 멈추고 하루 동안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억하여(자코르)’는 명령형으로 계약에 대한 강력한 요구를 나타내는 단어인데, ‘착오와 예외 없이 지켜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착오와 예외 없이 모든 일을 중단하고 기억하여 쉬는 특별한 날이라는 의미의 이 계명은 하나님 백성에게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잊어가는 날을 기억하라안식일 계명에서 핵심은기억하라입니다. 한글 성경은지키라가 주동사로 되어 있지만 영어 본문은기억하라가 주동사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안식일을 기억하는 것은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이고, 안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즉 안식일 회복 사업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인간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가 안식일 계명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잘 기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넷째 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안식일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곧 안식일 그날을 거룩하게 성별하는 것이 안식일을 기억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일까요? 이 또한 이 계명의 본문에서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우리의 일을 행하지만 일곱째 날은 쉬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히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시간에 적용되는 법이 계명은 일곱째 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전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6일 동안의 활동과 일곱째 날의 쉼을 반복하는 인간의 전 생애를 포함합니다. ‘사람은 자연 보호, 자연은 사람 보호라는 말처럼,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고 안식일은 사람을 지켜주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넷째 계명의 역사적 산 증인들이 있는데 바로 유대인과 재림교인입니다. 유대인은 안식일 준수의 산 증인입니다. 재림교인은 안식일의 형식뿐 아니라 내용의 의미를 알고 있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의 기원안식일은 시내산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제도가 아닙니다. 안식일을기억하라는 말은 시내산 언약 사건 이전에 안식일이 이미 존재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안식일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에서 안식일의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날에 쉬심으로 한 주일 7일 주기와 안식일 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2:1~3). 

기억할 날과 기억할 분일곱째 날 안식일을 기억하여 창조 사건을 기억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창조 사건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창조하신 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성수의 핵심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여 그분이 우리의 주권자임을 기억하며 그분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는 것은 돌봐 주신 행위나 물려주신 재물이 아닌부모님이라는 존재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곧 창조 세계에 경탄하기보다 창조주를 찬양하는 것이 안식일을 기억하는 것의 핵심입니다. 넷째 계명은, 그분의 백성들이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창조주의 이름과 직함이 포함되어 있는 유일한 계명입니다. 넷째 계명이 있기 때문에 다른 아홉 계명도 하나님의 계명으로서의 권위와 당위서을 갖는 것입니다. 넷째 계명은 그분의 이름이 하나님 여호와이시고 그분의 직함이 창조주시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넷째 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는 제도가 누구에 의해서 제정되었는지를 명확히 말해 줍니다.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다고 엄숙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20:11). 문서의 권위는 서명하는 존재에 따라 좌우됩니다. 보통 문서들은 내용의 마지막에 서명하지만 십계명은 특이하게도 본문의 중간에 서명이 들어 있습니다. 고대 왕국에서 문서의 중간 본문에 왕의 서명이 위치하던 형식을 따른 십계명 언약문서는 어느 누구도 도용할 수 없는 형식을 취하여 누구의 권위로 율법이 주어졌는지를 명확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성경상 제7일 안식일은 오늘날 무슨 요일인가 달력에는 분명히 첫째 날이 일요일이고 일곱째 날이 토요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한 주일을 월요일부터 시작하여 일요일을 일곱째 날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고 성경상 요일 제도에도 맞지 않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 일요일을안식 후 첫째 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28:1; 16:9; 24:1; 20:1; 20:7 참조). 달력으로 보아도 그렇고 성경의 요일 제도로 보아도 그렇고 일요일은 첫째 날이고 일곱째 날은 토요일 안식일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지켰지만 예수님 부활 이후에는 부활한 날 일요일을 성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성경에는 근거가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 사도행전에도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킨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 13:14; 13:27; 13:42; 13:44; 16:13; 17:2; 18:4 참조).

안식일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연구하시기를 원하는 분들은 인터넷 [진리바다] comeagain.or.kr에 들어가셔서안식일 문제’ 3회 강의를 들으시면 정확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안식일안식일을 성수하므로 얻게 되는 축복 중의 축복은내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나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로 명시하여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구별해 줍니다. 안식일을 잊으면 존재의 이유, 즉 인간의 정체성을 잃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히 지키는 것을 잊었을 때 마음속에서도 하나님을 잊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안식일의 의미를 잊었을 때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나라를 잃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과 그분의 모든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계명의 준수는 생각과 행동을 모두 포함합니다. 안식일을 성별한다는 것은 학교, 군대, 일터, 직장에서까지 안식일을 성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왜 안식일을 성별해야 할까요?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20:20)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선명하게 해 주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다섯째 계명: 인간 공동체의 축복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20:12)

인간관계의 첫째 의무이 계명은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6:1)는 의미입니다. 이 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법(5~10번째 계명) 중에서 첫 번째 계명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첫 번째 법에서 부모 공경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모 공경을 세상에서 지켜야 할 첫 번째 법으로 명시함으로써 이 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계명에서 모든 부모는 자녀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근거를 명확히 해 주셨습니다. 부모 공경은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은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떠나지 아니하리라”( 22:6)라는 말씀으로 자녀의 조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이자녀들아 모든 일에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3:20)라고 말한 것처럼 자녀들에게 부모에 순종과 공경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부모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부모 공경과 하나님 공경공경이란 무엇입니까? 공경한다는 것은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여 받들어 모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애정과 존경과 숭배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모 공경과 하나님 공경은 일맥상통합니다. 부모의 권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이 저희 자녀가 어렸을 때에는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서도록 친히 정해 놓으셨”(PP, 309)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부모 공경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 공경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의 정당한 권위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려는 사람은 먼저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란 자녀가 스스로를 책임질 나이가 될 때까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성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결정해 줍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섬기지만 부모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모순된 신앙이 아닐까요? 

부모 공경의 범위다섯째 계명에서는 자녀들에게 부모를 존경하고 순종하기를 요구할 뿐 아니라 부모를 사랑하고 부드럽게 대하며, 부모의 수고를 덜어 주고, 명예를 지켜 주며, 노후에 부모를 부양하고 위로해 주도록 요구합니다”(PP, 309). 즉 부모 공경은 신체적 보살핌뿐 아니라 정서적, 사회적인 세심한 배려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법은 부모뿐 아니라 지도자와 권세자들에게 갖춰야 할 자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계명은목사들과 나라의 통치자들과 하나님께서 권위를 위임하신 모든 사람을 존경하라.”(PP, 309)고 가르칩니다. 

사도는 이것이약속 있는 첫 계명”( 6:2)이라고 말합니다. 다섯째 계명을 지킬 때 주어지는 복은생명이 길리라입니다. “잠시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계명은 순종하는 사람들은 좋은 땅에서 오래 살리라는 공약이다. 그러나 이 계명은 보다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포함한다. 이 세상이 죄의 저주에서 해방될 때 이 땅에서 그들이 영원히 살게 되리라고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PP, 309). 

부모 공경을 가르침부모 공경은 인간이 배워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입니다. 인간 사회의 질서와 행복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이 가정에서의 부모 공경과 순종의 법입니다. 이 법의 축복은 삼중으로 적용되는데, 부모를 공경하는 개인에게 축복이 되고, 그 축복이 가족에게 그리고 사회와 국가로 파급됩니다. 이 계명은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나아가 인류가 행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여러 해 전 시외버스 기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손님이 거의 없는 버스 안에서 앞자리에 앉아 주로 버스 기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내용은 그가 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용돈을 드리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용돈을 드릴 때가 되면 빳빳한 새 지폐로 바꾸어 봉투에 넣고 아들을 부른답니다. 아들이 오면할아버지께 가져다드려라.” 하고 봉투를 아들에게 건낸답니다. 아들은 할아버지 방으로 가서 할아버지께아빠가 드리랬어요.” 하고 용돈을 전해 드리게 됩니다. 부모에게 용돈을 직접 드리지 않고 굳이 아들을 통해 드리는 이유를 짐작하시겠습니까? 

부모공경과 장수(長壽) – 부모 공경은 부모나 자녀 모두에게 큰 행복을 줍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할 때 부모는 자녀를 위해 고생한 일들에 보람을 느끼고 수고를 잊게 됩니다. 우리의 자녀가아빠, 너무 감사해요. 저희를 이렇게 바르게 키워 주셔서요.”, “엄마, 고마워요. 저도 엄마처럼 살래요!” 하고 말할 때 행복하지 않을까요? 

부모 공경은 자녀에게 장수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부모 공경으로 생명이 길리라는 축복은 이 땅에서 뿐 아니라 하늘나라까지 연장됩니다. 어떻게 이 축복을 얻게 될까요? 부모 공경하는 자녀에게 감동 받은 부모는 강한 책임감으로 죽기까지 자녀에게 사랑을 베풉니다. 이런 부모의 지지를 받은 자녀들은 정서적, 사회적으로 바른 인성을 갖추고 원만하고 건전한 삶을 살아갑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순종을 배운 자녀들은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고 바른길을 가게 됨으로써 땅에서 축복을 받습니다. 부모 공경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웠으니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부모의 교훈대로 부모가 죽어도 신앙의 길을 떠나지 않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연습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부모 공경보다 자녀 사랑이 먼저입니다. 어려서부터 부모 공경보다 자녀 사랑이 우선하는 것을 배운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부모 공경도 모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도 모르는 세대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축복이 되는 부모 공경을 이전보다 더 부지런히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계명: 인간 생명의 축복

살인하지 말지니라”( 20:13)

생명을 주신 분살인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 9:6)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빼앗는 죄는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다른 것으로 대신 갚을 수 없는 큰 범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에게 만물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살아 숨 쉬는 생명체를 죽이는 것은 만물을 돌보는 일에 어긋납니다. 죄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죽음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살인은 절대 금하게 되어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창조 정신에 위배됩니다. 살인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인간에게는 생명을 취할 권리가 없습니다. 생명을 빼앗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정신과 정반대되는 행동입니다.

인간 생명의 가치인간의 생명은 왜 귀하고 가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을 만드시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시고 또한 죽게 된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가치는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지불되는 값으로 정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구속하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걸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인간 사랑을 보여 줍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8:4)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을 죽게 하는 것들살인 도구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특정한 도구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말로도 살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우리의 태도와 행동으로도 살인할 수 있습니다. 살인에는 신체의 생명 활동을 멈추게 하는 행동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괴롭히는 것도 포함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 3:15). 

제어되지 아니한 혀는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악이 가득한 것”( 3:8)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5:22)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는 중에도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5:23~24)고 가르치셨습니다.

살인의 반대말살인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 법을 적극적으로 지키는 것은 살인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뿐 아니라 죽게 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봉사 활동은 다른 사람을 살게 하고 나도 살게 합니다. 필자는 학생들과 함께 여름방학에 중국 백두산 가까이에 있는 시골 초등학교에서 봉사한 적이 있습니다. 생활체육과 학생 두 명이 축구교실을 맡아 어린이들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두 학생은 처음에는 해외여행 간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봉사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어린이들이 새벽부터 찾아와서 축구를 배우며 좋아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봉사 활동이 마칠 때에는봉사대에 참여한 이유가 대원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놀고 즐기는 것이었는데 봉사 활동을 하면서 봉사의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봉사는 조금 했는데 너무 많은 것을 얻어서 갑니다.” 라고 간증했습니다. 나중에 두 학생의 학교 생활도 긍정적으로 변화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봉사는 다른 사람을 살릴 뿐 아니라 자신도 살리는 축복이 됩니다. 

타인을 위한 희생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희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친절, 용서, 자비, 용납, 긍휼의 마음과 태도는 죽게 된 사람을 살립니다. 우리가 살려야 할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족, 친구, 이웃은 우리가 살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주는 것은살인하지 말라는 이 계명을 가장 적극적으로 준수하는 것입니다. 또 가족, 친구, 이웃을 넘어 우리가 살려야 할 대상에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함됩니다. 직접 살인하지 않더라도 죽게 된 사람을 방치하는 것은 간접 살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4). 

주님은살인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죽는것은 허락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면 결국은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축복이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인간이 여섯째 계명의 정신을 따르면 다른 사람을 살게 하고 자신도 살게 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 땅에 거하는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려 애쓰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곱째 계명: 가정 행복의 축복

간음하지 말지니라” ( 20:14)

저주로 변해버린 축복의 결혼제도에덴에서 제정된 결혼제도는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에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을 담고 있습니다. 결혼제도는 인간을 번성하게 하며 사회의 질서와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킵니다. 올바르게 사용되면 가장 큰 복이 되는 결혼제도도 오용될 때에는 가장 큰 저주가 됩니다. 간음은 불법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경계를 허무는 일이며, 자기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음은 하나님이 세우신 법과 질서를 허무는 것입니다. 특히 축복이 되는 가정 제도를 파괴하는 원인이 됩니다. 자연계의 법칙이 파괴되면 그 결과가 재연 재해로 나타나듯이 간음하지 말라는 일곱째 계명을 어기면 가정의 연합이 깨집니다. 

가족의 해체나 도덕적 혼란이 야기되고 불법이 만연하게 됩니다. 그 영향은 가정뿐 아니라 사회 공동체와 온 나라까지 미칩니다. 바벨론, 그리스 등 수많은 나라의 멸망 원인도 외부의 군사적 침략보다 내부의 도덕적 부패였습니다. 노아 홍수 당시의 세상이 물로 멸망한 것도,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에 소멸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경계가 허물어지는 세대 불법이 두려운 이유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질서와 경계를 허물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104:9) 하셨습니다. 땅과 물의 경계가 없어진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요? 몇 년 전 일본과 동남아 지역에서 발생한 쓰나미의 위력을 우리는 잘 압니다. 바닷물이 경계를 넘어설 때에 얼마나 엄청난 재앙이 되는지 우리는 보았습니다. 

자연계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하나님의 질서와 법칙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항상경계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밤과 낮을 구분하셨는데, “빛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26:10). 하나님은 육 일과 일곱째 날을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시고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21~24)고 하셨습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웬일입니까? 남자와 여자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내 것’ ‘네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간음은 자기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적질만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 제도 역시 자기 것과 남의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39:9). 자기 것과 남의 것을 잘 구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여덟째 계명: 인간 번영의 축복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20:15)

이 계명은 또 일상 업무의 가장 사소한 일에도 엄격한 성실을 요구합니다. 이 계명은 상거래에 있어서 속이는 것을 금하는 동시에 당연히 지불해야 할 부채와 임금의 지불을 요구합니다. 이 계명은 또 남의 무지와 약점과 불운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 하는 모든 행위는 하늘 책에 사기로 기록된다고 선언”(PP, 310)합니다.

인간의 소유권하나님은 각 개인에게 소유권을 부여하고 인정하십니다. 이 법은 다른 사람의 소유에 부당하게 손대는 것을 금함으로 개인의 소유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법은 자신의 재산권과 이웃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신 소유권에는 기한이 있습니다. 영구적인 소유가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있을 동안에만 부여된 한시적인 소유권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스스로 땀 흘려 일한 노력의 대가로 재물을 얻습니다. 둘째, 부모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증여나 선물을 통해 재물을 얻습니다. 셋째, 정당한 방법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소유를 도적질하여 내 소유로 삼아 재산을 증가시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적질의 확대해석도적질은 사탄의 마음을 닮은 행위입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것을 도적질하려고 했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지 않았더라도 도적질에 해당하는 것이 많습니다. 횡령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도록 주신 건강, 시간, 재능, 직분 등을 불법으로 가로채서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치와 낭비는 자신의 재정을 형편과 분수에 맞지 않게 사용하므로 도적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듭니다. 악한 의도를 가진 농담이나 비방은 다른 사람의 선한 이름이나 평판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토색이나 뇌물이란 억지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고 본인이 이득을 취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돕는 사람인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돕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활의 원칙은 아담에게네가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 되리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노동하고 노력해서 식물을 얻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짓은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살기 위한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이용하거나 남을 의지하는 것도 도적질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왜 도적질을 하게 될까요?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하면 도적질하게 될 수 있습니다. 게으르고 가난하면 도적질할 유혹을 받아 시험에 빠집니다. 욕심이 강하면, 먹고 살 만해도 재물을 더 얻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하늘 백성들은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30:8~9) 라고 기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말에거지근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뭐든지 남의 도움 받기를 좋아하고 주체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받는 것을 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는 의존심이 아니라 자립심입니다. 일하지 않고는 먹지도 말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일을 하되 돈을 버는 목적이 확실해서 남을 돕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선한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타인을 의지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일하여 자신과 가족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려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재물을 대하는 바른 정신 곧 청지기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율법 준수그리스도인들에는 여덟째 계명의 소극적인 준수보다 적극적인 준수가 중요합니다. 이 계명의 적극적인 준수는 무엇입니까?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나눠 주는 것입니다. 나만 부유하게 되려는 것이 아니라 남도 부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회심한 사람의 특징은 남에게 도움을 받던 사람에서 남을 돕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4:28)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하늘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이나 재물은 결코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경험들과 추억들은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남을 돕고 봉사했던 경험들, 주를 믿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던 경험들, 가족이나 이웃들과의 교제 중에 얻게 된 크고 작은 기쁘고 보람된 경험들은 하늘에서도 이야기 나눌 주제가 될 것입니다. 그 경험의 결과물로 만들어진타인중심으로 변화된 품성을 하늘에 가지고 갑니다.

믿음과 도적질진리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도적질과 같은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거나 불신하게 될 때 도적질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닐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등등을 걱정하다 보면 하나님의 법도를 벗어나서 세상 사람들처럼 돈 잘 벌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재물을 쌓으려는 욕심과 조급함이 불법을 조장합니다. 그것은 폭리, 사기, 횡령, 탈세, 빌린 것을 갚지 않는 것 등 불법을 행하게 합니다.

주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덟째 계명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자녀들에게 여덟째 계명을 적극적으로 순종하도록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생활 속에서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나누는 것과 자립심을 가지도록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이 습관이 되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자녀가 어려서부터 노력을 통해 스스로를 살게 하고 어려운 이웃을 살리게 하는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치면 후일에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아홉째 계명: 인간 명예의 축복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20:16)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든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거나 나타내는 것을 절대 금하십니다. 아홉째 계명은 인간의 명예를 지켜 주는 법입니다. 이 계명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우리의 이웃을 속이려는 의도나 목적으로 어떤 문제에서든지 거짓말하는 것은 모두 이 계명에 저촉된다. 속이려는 의도가 거짓을 구성하는 것이다. 눈짓, 손짓, 얼굴 표정 등으로도 말로 하는 것과 같이 효과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모든 고의적인 과장과 그릇되거나 과장된 인상을 전하려고 계획된 시사(示唆)나 암시, 비록 사실일지라도 오해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이 계명은 잘못 전하거나 나쁘게 추측하거나 비방이나 고자질을 함으로 이웃의 명망을 손상시키려는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 고의적으로 사실을 은폐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일도 아홉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PP, 310).

증거란? – 증거(evidence)어떤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이며, 증언(testimony)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말입니다. 증언에는 보고, 듣고, 알고, 믿고 있는 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과 언어적 표현이나 태도와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도 포함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증거증언증거라는 한 단어로 번역되었지만, 대부분 증언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증인이란 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사람인데, 예수님은충성되고 참된 증인”( 3:14)이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증언하실 때 결코 진리를 축소하거나 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참된 말을 하는 정직한 증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증인의 중요한 임무는 사실대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라”( 8:16)고 말씀합니다. 

입을 잘 사용함거짓 증거(증언)의 도구는 무엇입니까? 혀입니다. “혀는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3:8)고 하였습니다. 혀는 긍정적인 측면이든 혹은 부정적인 측면이든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제어해야 합니다. 거짓 증거(증언)의 다른 형태는 무엇입니까? 남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비방은 누군가에 대한 거짓 모략으로 그의 덕망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비방은 특히말로 하는 살인이라고 합니다. 소문을 퍼뜨리는 것과 거짓말을 받아들이는 사람 역시 험담꾼과 같이 유죄입니다. ‘침묵은 금일 때도 있지만 거짓일 때도 있습니다. 장물을 받은 사람도 도둑과 마찬가지로 유죄이듯 잘못된 것을 침묵하는 것도 거짓 증거(증언)입니다. 아첨은 아첨꾼과 아첨을 받는 사람 모두의 영혼을 더럽히는 또 다른 형태의 거짓 증거(증언)입니다. 

적극적인 증거우리는 어떻게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이 법을 적극적으로 준수할 수 있습니까? 이 법의 소극적인 준수는 말로 실수하지 않도록 최대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의 적극적인 준수는 이웃과 다양한 교제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사귀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진실한 말, 칭찬의 말, 감사의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누구를 증거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나의 증인”( 43:12)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중심의 대화보다는 하나님 중심의 대화를 연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증거(증언) 하고, 상대의 필요에 관심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하나님을 잘 증거하고 있습니까? 위로가 필요한 이웃에게 칭찬과 격려를 전하며 자기 자랑보다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면 참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참된 증인이신 예수님처럼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 14:5)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참된 증인의 삶을 살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하나님은 어떤 증인입니까? 예수님은충성된 증인”( 1:5)이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3:14)이라고 불리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증인이 되어야 할지 우리의 모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잘 증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증거 하셨습니까? 그분은 모든 사람을 존귀한 존재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하고 다 존귀하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도록 당신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증거 했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 모든 사람이 돌을 던져 정죄했지만 주님만은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따돌림을 받던 삭개오를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정죄 받고 낙심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죄인이 주님을 바라보고 자신의 가치를 깨닫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사탄의 거짓 증거이 우주에서 가장 대표적인 거짓 증인은 사탄입니다. 그 거짓 증인은 사람들에 대해 어떤 증거를 합니까? 사탄은 대비방가요형제에 대한 참소자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비방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사탄의 일을 하는 것이고 우리 안에 사탄의 정신이 있는 것이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8:44).

우리는 거짓 증거에 대해 어떻게 자녀를 교육해야 할까요? 어린이는 본래 거짓말쟁이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거짓말을 습득하는 것은 어른들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참 백성의 특징은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 14:5),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 22:1)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을 거짓은 입 밖에도 내지 말 것은 물론이고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진실하고 참된 것이어야 합니다. 

 

열째 계명: 인간 개심의 축복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20:17)

마음에 관한 법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탐내지 말라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말이나 행동처럼 외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남의 것을 갖고자 하는 욕심이나 갈망이 행동으로 구체화되기 전의 생각을 말합니다. 무엇을 탐내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구약 시대 사람들의 5대 재산은 아내, 남종, 여종, , 나귀였습니다. 그러나 탐욕의 대상은 사람, 생물, 물질, 명예 등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다른 계명들과 비교할 때 이 계명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 계명은 모든 계명의 요약이며 완성입니다. 탐심이 나쁜 이유는 죄와 불법을 행하도록 부추긴다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의 아홉 계명은 주로 말과 행위에 관한 것인 반면 열째 계명은 마음과 생각에 관한 것으로서, 탐심은 모든 죄를 범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잘 지킨다면 모든 계명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처럼 불법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 가운데 아홉 개의 계명은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열째 계명이 말하는 탐욕의 마음을 가지고서는 십계명을 온전히 지키기 어렵습니다.

세속화 되어가는 교회이미 언급했던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라는 책 제목에서세상 속의 교회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가지고 다양한 봉사를 함으로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교회 속의 세상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회는 세상 속에 있기는 하지만 세상과 구별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어느새 세속화되어 교회 속으로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들어오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데칼로그>라는 책 서두에 신학교를 졸업한 신학생이 목회 현장에서 일하면서 존경하는 스승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교수님 저는 영국의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세상을 실감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역시 형태는 다르지만 신학교에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이 편지의 내용은죄와 불법을 세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본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속에 들어와 있는 세속화된 생각과 가치관과 습관들을 어떻게 털어내야 할지 고민하는 일선 교회 목회자와 신학교 교수를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속에 들어온 세속화의 경향과 정신을 벗어 버리는 일은 탐욕의 정신을 버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교회 속의 탐욕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내 안에 있는 탐욕의 정신을 들여다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적극적인 탐심탐내지 말라는 이 법의 적극적인 준수를 위한 선행 조건은 선한 욕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탐내고 욕심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몇 가지를 보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6:33)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열망하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되기에 합당한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는 것은 선한 욕심입니다. 우리가 욕심내어 구해야만 하는 것은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11:13)고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은혜입니다.

선한 탐심우리는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욕심내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고후 4:18)하기 때문입니다. 사도가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5~8)라고 강권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의 마음을 닮기를 욕심내어 구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고자 하는 선한 욕심을 지닐 수 있습니다. 

선한 욕심을 지녔던 사람들의 모습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옵니다. 아벨, 에녹, 노아로부터 시작해서 각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간절히 사모함으로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버렸습니다.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이 땅에서 잠시 고난을 받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하늘의 상급을 선택했습니다. 

탐심과 위험한 만족 인간의 탐심은 채우고 채워도 끝이 없습니다. 현재의 복에 만족할 때에만 탐심은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 4:11)를 배워야 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13:5)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딤전 6:6~10)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피해야 할 위험한 만족도 있습니다.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잘못된 자기만족입니다. 이 교회는 스스로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3:14~18)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가난하고 벌거벗고 눈이 멀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나 영적 경험이나 성취한 것에 도취되어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만족하거나 추구하고 있는 것이 탐심인지 선한 욕심에서 나온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