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이상(異像)은 ‘교회’로 시작하여 ‘새 예루살렘 성’으로 끝납니다. 즉 ‘영적 제3성전’으로 시작해서 ‘하늘 새 예루살렘 성’으로 끝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성도들(고전 3:16)은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악을 소멸하시기까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계시록에서 두 성성읍, 도시에 관한 이상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시작되면서 나오는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의 일곱 도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지리적으로만 아니라, 그들의 실제 형편에서도 예루살렘과 로마 ‘사이’에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이교와 헬라 문화를 가진 성도시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두 세계는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행 19장).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될까요?
“주여, 누가 주를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누가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까” (계 15:4)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계 13:4)
이 두 말씀은 그들의 충성과 사랑과 애정이 “경배”로 나타날 것을 보여줍니다. 바벨론 성에 속한 사람은 “짐승에게 경배”하고(계 13:4, 8, 12, 15; 14:11 등), 새 예루살렘 성에 속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과 어린양께만 경배합니다(계 14:7; 15:4 등). 그리고 이 경배가 표가 되어 운명이 결정된다고 보여주셨습니다(계 13:8).
중간은 없습니다. 그물의 비유에서, ‘좋은 것’과 ‘못된 것’이 완전히 구분되듯, 가라지의 비유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저절로 구분되듯,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명한 기준으로 구분하듯, 열 처녀의 비유에서 등과 함께 기름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가 완전히 구분되듯, ‘참된 경배’를 드리는 사람과 ‘거짓 경배’를 드리는 사람이 완전하게 구분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간신히 구원받는 사람도 없고, 아슬아슬하게 멸망에 떨어질 사람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서 살게 장소가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건축될 것이라고 하는 ‘제3성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예수께서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으로 봉사를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참조)
② 종말의 책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인 ‘교회’로 시작하여(계 2~3장), 그 영광스러운 성취와 완성인 “새 예루살렘”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계 21~22장 참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땅의 물리적인 제3성전의 건축‘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의 피로 하늘 성소 봉사를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혼란스럽게 하고 훼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제3성전 건축’은 거짓 주장이라는 전제하에 ‘새 예루살렘 성‘이 갖는 의미를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장소로서 새 예루살렘 성
하나님은 요한을 통해서 ‘새 예루살렘 성을’ ‘천국’이자 ‘거룩한 도시’이자 ‘성전’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 도성은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제국의 수도인 ‘로마’와 비교할 장소가 아닙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구원받은 자들의 노래가 가득한 곳이며, 신의 임재가 충만한 곳이며, 따라서 죽음이 있을 수 없는 곳이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직접 그의 얼굴을 보게 될 곳입니다.
그 성은 모든 성이 앙망할 “크고 높은 산”에 내려올 것이며(계 21:10), 그곳이 우주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사 2:2). 하나님의 산이라 불릴 그곳에는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을 뿐만 아니라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곳이 될 것이며(사 11:9; 계 21:4),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곳, 즉 샬롬이 충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사 65:25).
또한 새 예루살렘 성은, 옛 바벨론 성이나 로마시처럼 물을 끌어올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계 22:1~2). 강을 이룬 생명수에 뿌리 내린 나무들이 생명과를 맺게 됩니다(사 39:10; 55:1; 겔 47:1~12; 계 22:12, 17 등).
새 예루살렘 성의 기초 돌은 보석이고, 문은 하나의 거대한 진주로 되어 있고, 그 거리는 정금 거리로 되어 있습니다(사 54:1~12; 계 21:18~21). 어린양의 신부로서 새 예루살렘 성이 단장한 모습은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이며 순결함입니다(계 19:7~8). 이것은 ‘에덴동산’의 영광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장소로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 놀라운 이상은 모든 아름다운 것, 모든 신령한 것, 모든 완전한 것, 생명이 가득한 것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하늘 찬양의 모습에서 중심이 되는 주제는 언제나 하나님과 어린양입니다(계 4, 5장 등). 대조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기를 거부한 도성바벨론’은 그 도성이 비록 인간적인 화려함으로 치장하고 부유함을 자랑하지만(계 18장), “하루 동안”에 망하게 되고 ‘바벨론을 향한 애가’가 불릴 곳입니다.
‘장소로서 새 예루살렘 성’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곳에 성전이 없다는 것입니다(계 21:22).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곳에 계시기 때문에 ‘그 성 전체가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늘 성전의 표상인 지상 성전에도 그 안으로 부정한 것이 들어갈 수 없었던 것처럼, 부정한 사람은 ‘장소로서 새 예루살렘 성’ 문을 통과하여 들어갈 수 없습니다(계 21:27; 사 66:17). 그 영화로운 곳에 들어갈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14:12; 11:19).
2. 백성으로서 새 예루살렘 성
둘째로 살펴볼 것은 ‘백성으로서 새 예루살렘 성’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성전’ 개념은 이미 예수의 말씀과 바울의 증언을 통해서 살펴보았지만, 계시록은 그 개념을 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계시록은 이 땅의 ‘성도들’의 ‘의로운옳은 행실’이 어린양의 하늘 신부인 ‘새 예루살렘 성’의 ‘예복’으로 입혀진 놀라운 이상을 보여줍니다(계 19:8). 즉 ‘성도들’-‘새 예루살렘 성’이 대응이 되고 ‘의로운 행실’-‘예복’이 대응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새 예루살렘 성’은 ‘어린양의 백성’인 셈입니다.
그러면 ‘그 성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계시록은 ‘성도’를 ‘우리 하나님을 위한 나라와 제사장들’(5:10; cf. 1:6)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한 나라이며 하나님을 위한 제사장들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백성이며 나라로서 “이긴 자”라는 의미이며, 제사장들로서 ‘어린양을 따라가는 자들’이며 ‘참된 경배’를 드리는 자라는 의미입니다(계 5:9; 1:5; 14:4; cf. 4:10; 5:14; 7:11; 11:16; 14:7; 15:4; 19:4; 19:10; 20:4; 22:9 등).
‘새 예루살렘 성 백성’으로 간주 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말합니다(계 11:1).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노라고 공언한다고 모두 ‘하나님의 백성’ 즉 ‘새 예루살렘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 백성’으로 간주 될 ‘참된 경배자’는 “목 베임”을 당할지라도 “예수의 증거믿음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계명 때문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은 자들입니다(계 20:4).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3부에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백성으로서 새 예루살렘’은 거룩해진 백성,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람들입니다(계 14:12; 20:4). 요한계시록에서 ‘이긴 자들’은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있거나 순교한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임재로서 새 예루살렘 성
계시록 21장 이전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 그의 보좌가 있는 ‘하늘’로 한정합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이 땅에 임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박해받는 ‘성도들’사람으로서 성전의 속 사람에 있는 내면의 성소에 임재하였습니다(계 11:1~2; cf 13:6).
그런데 계시록의 절정인 ‘새 예루살렘 성’의 장면이 시작되자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보라 하나님의 장막헬. 스케네; 히. 샤칸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계 21:3)라고 외칩니다. 이 말씀은 ‘이 땅의 성전’제2성전이 폐하게 되고, 대신, ‘사람으로서 영적 성전’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친히 함께 있게 되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예언의 이상이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제1, 제2성전와 교회의 역사영적 제3성전가 ‘하늘 제3성전장막’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 성의 문 위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그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계 21:11~14). “이스라엘과 교회의 역사가 새 예루살렘에서 실현됩니다.” Richard Bauckham, The Theology of the Book of Revelation, 137.
‘이 땅의 성전’제1,2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셰키나이 지성소에 임재하였고, ‘사람으로서 영적 제3성전’에서는 성령이 하나님의 법이 새겨진 성도의 마음에 임재하였지만, 이제 성전 이상이 완성되고 성취된 ‘하늘 제3성전장막’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그 백성들과 함께임재 하시고 그의 영광이 그들을 비춥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하늘 제3성전’에서는 해나 달이나 등불도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계 21:11, 18~21; 22:5). 인간 제사장이나 성령의 중재조차도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새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를 ‘직접’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성도들의 눈에서 ‘직접’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지상 성전에서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일차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 그의 백성이 된 성도들 모두가 ‘직접’ 그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계 22:4).
하나님이 보여주신 ‘제3성전’은 제1성전솔로몬 성전이나 제2성전스룹바벨 성전과는 결정으로 다른, 그리고 그리스도의 하늘 중보 사역이 시작된 후 그분과 연결된 ‘영적 성전‘으로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도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임재의 직접성’입니다. 이전에는 그의 영광을 보면 죽게 되었지만(출 33:20~3; 삿 6:22~3), 이제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임재에 ‘직접’ 들어가게 됩니다.
한편, 이전 두 성전 시대에는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갔지만, 이제 제3성전의 때에는 무한한 기쁨과 감사로 직접 그 임재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기 위해서는 ‘짐승의 피’나 ‘인간 중보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충성의 증거’가 필요할 뿐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행위로’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산 사람인지 ‘입증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행위들이 [그들의 뒤를]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14:13. 원문 성경)
예수님은 계시를 통해 ‘하늘 제3성전‘에 관한 하나님의 이상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하늘 새 예루살렘 성‘은 ① 그 성 전체가 성전이며장소로서 새 예루살렘 성, ② 몇몇 사람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 모두가 거룩한 곳이며백성으로서 예루살렘 성, ③ 중보자를 통해서, 특별한 때에만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는 직접적인 임재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임재로서 새 예루살렘 성.
’하늘 새 예루살렘 성의 3중 이상‘은 ① 이스라엘과 교회의 역사가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며, ② ‘지상 제3성전’이 건축되고 다시 동물의 피를 드리는 제사가 회복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③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겠다고 예언한 모든 예언들이 ‘새 예루살렘 성’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④ ‘영적 제3성전’인 성도들이 ‘하늘 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영광스러운 장면으로 완성된다고 보여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