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체로 인간이 가장 많이 하고 있고 해야 하는 것은 말이다. 가장 많이 듣고 접하는 것도 말이다. 나는 누구일까? 말의 덩어리이다. 나의 말과 행동은 배운 말에서 비롯된다. 어려서부터 읽고 듣고 경험했던 말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여 오늘의 내가 된 것이다. 이렇듯 중요한 말이지만 말의 중요성을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한다. 내가 말의 덩어리라면,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배운 말의 결과라면, 나의 정체성이 말에 기초되어 있다면, 내가 바뀔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새로운 말을 배우는 것이다.

성경은 말에 대한 다른 차원의 빛을 비춰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말씀인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배우게 될까? 

하나님께 하나님의 말을 배워야만 하나님의 사람인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채워진 사람은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갖게 된다. 채워지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이 인격 속으로 들어온다. 말은 교제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으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는 필수적이다. 차원이 다른 새로운 말이 나의 옛말을 대체할 때 나의 옛사람은 사라지고 새로운 사람이 된다.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말로 대체된 사람이다. 

 

말과 문화는 한배를 타고 있다

광주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성경 교사를 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에게 성경을 가르쳤는데 특이한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외모는 하얀 백인인데 전라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하는 학생이었다. 그냥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고 옛날 할머니들이 쓰시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친구들의 사투리를 압도하는 희디흰 백인 학생을 보고 하도 신기하여 나는 턱이 입에서 여러 번 떨어졌다. 그 학생을 데리러 오신 할머니를 만난 날에서야 나는 마침내 호기심을 해소할 수 있었다. 학생의 어머니는 미국 국적의 백인 남성과 국제결혼을 했는데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나 소녀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전라도 사투리를 맛깔나게 하시는 분이셨다. 할머니의 찐한 사투리는 손녀에게 전이되었고 껍질은 백인인 손녀는 알맹이는 전라도 소녀가 된 것이다. 살아있는 말은 혼자 배울 수 없다. 말은 누구에게 배우는 것이다. 말만 배울 수도 없다. 말은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말을 배우면 문화가 감자 넝쿨처럼 따라온다. 그 소녀는 할머니에게 전라도 사투리를 배우면서 전라도 문화를 물씬 풍기는 진짜 전라도 소녀가 된 것이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수십 년을 교회와 함께 살며, 30년 가까이 목회자로 교회를 섬기는 입장에서 바라보면 한국교회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비교해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현재의 위기는 말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말을 잃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풍기는 향기로 존경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던 과거가 있었다.

말씀이 내면을 채운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를 지도하고 정화하며 축복된 나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세계가 인정하는 바다. 자국어를 잃은 민족은 정체성을 상실하듯이 하늘의 언어를 상실한 그리스도인은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말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다. 교회가 왜 세속화가 되고 있을까? 말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말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왜 세상의 지탄을 받는 것일까? 세상의 말로 채워진 성직자들과 성도들이 많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은 핸드폰 속에 있으나 유튜브를 더 많이 시청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날마다 충분히 배우지 않는다. 배우지 않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얼마나 많은 뉴스를 듣는가? 세상의 뉴스는 나쁜 소식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좋은 소식은 여간해서는 뉴스가 되지 않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얼마나 많이 세상의 글들을 읽는가? 세상의 말로 날마다 자신을 꽉 채우는데 개인과 교회가 세속화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무릎 아래 앉아 다시 말을 배워야 한다. 누구에게 어떤 차원의 말을 배우는가는 그 학습자의 생각과 품성과 운명의 차원을 결정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말을 배울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말을 배우게 된다. 차원이 다른 말은 차원이 다른 품격과 운명을 만들어 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말씀이신 예수님께 날마다 그분의 말씀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말의 힘과 영향력을 잘 알고 계시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수기 14:26-28).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이집트의 말을 배우고 그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몸은 출애굽했으나 정신은 출애굽하지 못했다.

마음의 출애굽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기 전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배운 불평과 생명 없는 죽은 말만을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출애굽의 위대한 사건을 경험했으면서도 애굽의 정신을 버리지 못했다. 말의 해방이 없으면 해방이 아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듣는다.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람의 운명을 순간마다 꼴 지어 간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옛말을 버리고 새로운 말을 배워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말을 배우지 못한 불신자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말을 가르치셨지만 백성은 말을 배우는데 게으르고 더디다. 말을 배우는 과정은 쉽지 않다. 이미 자리를 잡은 옛말이 강력한 저항을 하기 때문이다. 광야의 경험이다. 사탄은 말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다. 망한 애굽의 말이 출애굽한 백성의 정신을 붙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탄은 말로 사람을 지배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에 죽음의 말과 하나님에 대한 반역적인 말을 주입하기에 지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이 들어오면 옛말의 저항이 거세다. 말 뒤에는 영적인 세력이 버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악의 대쟁투는 말의 전쟁이다. 

 

하늘의 언어는 하늘에서 살다 온 친구에게 배워야 진짜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하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한복음 15:15). 친구! 얼마나 좋은 관계인가! 아주 사소한 일까지 속속들이 터놓고 말을 할 수 있는 관계가 친구 사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알게 해주시기를 원하신다. 외국어를 잘하려면 날마다 배워야 한다. 하늘의 언어는 땅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이 배우기에 쉽지 않다.

땅의 언어가 죽음의 언어라면 하늘의 언어는 생명의 언어다. 땅의 언어는 한계가 명확하다. 하늘의 언어는 영원하다. 땅의 언어는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인간의 운명을 넘어갈 수 없다. 하늘의 언어는 죽음을 넘어가 하늘로 초대한다. 하늘의 언어는 차원이 다르다. 파워가 다르다. 하늘의 언어를 누가 잘 알겠는가?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을 친구삼아 배워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3, 96, 105). 어떤 말을 배우는가는 어떤 차원으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다른 차원의 말을 배우지 않으면 다른 차원의 삶도 없다. 하늘의 친구에게 하늘의 언어를 열심히 배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