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지나면서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여러 해가 지나갔다. 공상과학 소설에서나 언급되고 과학자들도 두려워하는 놀랍고 신비스러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21세기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아마도 가장 정직한 대답일 것이다. 다만  21세기의 충격은 각 분야에 걸쳐 엄청날 것이라는 것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특별히 2020년 초에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번진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의 의식구조와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21세기에 기독교의 재림 신학에는 과연 어떤 변화가 올 것인가? 성경의 모든 예언적 기간이 끝나고 지구 생존 6,000년 설도 시들해진 후, 눈앞에 펼쳐진 또 하나의 1,000년을 바라보면서 기독교인들은 대체 어떤 재림 신학을 가지고 살아갈까? 어쩌면 이런 논의 자체가 아예 필요 없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공산주의를 일거에 무너트린 하나님의 섭리가 삽시간에 불의한 지구의 역사를 끝내실 지도 모른다. 혹은 남북이 통일되어 복음이 물밀 듯이 북한으로 들어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별다른 일없이 21세기가 흘러간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의식구조에는 어떤 변화가 올 것인가? 그런 변화가 오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하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대책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본다. 우선 몇 가지 예측 가능한 문제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들이 일어날 수 있다.

첫째로 21세기에는 냉담과 무관심한 분위기가 교회 안팎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재림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회의와 불신이 생겨날 것이다. 따라서 열심이 식고 냉소적인 분위기가 생겨날 수 있다. 둘째로, 재림의 긴박성이 희석될 것이고, 또 다른 한 세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능력과 21세기의 물질문명에 대한 신뢰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될 것이다. 신세대 청소년들은 첨단 물질문명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세속화되고, 그 세속화의 물결은 모든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퍼져 나아갈 것이 우려된다. 특히 최근에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AI), 4차 산업, 6G와 같은 첨단 문명이 인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우리 모두는 불안한 마음으로 미래를 주시해야 하는 불확실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초기 기독교가 위기를 극복한 방법

이런 혼란의 때가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떻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교회도 재림의 지연(delay of parousia) 때문에 생긴 위기가 있었다. 신자들은 그들 세대에 반드시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학수고대하면서 그들이 보고들은 것을 기록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의 세대들이 하나 둘씩 죽어 가는데도 파루시아(재림)는 오지 않았다. 어쩌면 파루시아는 그 세대 안으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을 때 초기 교회는 엄청난 실망과 혼란을 겪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 세대 안에 재림이 없다면 도대체 언제 마지막이 온단 말인가? 그들이 겪은 낙심과 혼란은 그때로부터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암담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재림이 그렇게 지연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4:3; 24:29, 34; 벧전 4:7; 22:20).

주목할 것은, 성경 어디를 보아도 초기 교회에 재림의 지연 때문에 집단적인 배교나 대 실망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신앙의 지주들이 하나씩 없어져 가는 그 혼란의 때에 초기 교회의 지도자는 어떻게 교회를 지도했기에 그렇게 슬기롭게 그 엄청난 위기를 극복하고 교회를 안정시킬 수 있었을까? 우리는 성경에서 그 방법을 몇 가지 찾아 볼 수 있다.

첫째로 그들은 재림이 지연되고 그 어떤 확실한 증거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재림의 확실성을 설파하였다. 비교적 후대에 쓰여진 서신들( 12:12; 10:37; 벧전 4:7)에도 지체 않고 오실 그리스도의 모습과 긴박함이 잘 나타나 있으며 1세기가 끝날 무렵 쓰여진 요한계시록도 예수님이 속히 오시겠다는 약속으로 가득 차있다( 1:1, 7; 22:28). 신약 성경은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기원으로 끝나고 있다.

둘째로 그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정확한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그것은 아들도 모르고 천사도 모르는 것이었다. 사도행전의 기자도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사람의 알 바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했다( 1:7).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은 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은 헛수고 일 뿐이며 우리는 이점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25)에서, 열 처녀는 신랑이 더디 오므로 기다리다 지쳐서 다 졸며 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찍 오리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의 기름은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예비된 기름이 꼭 필요했다. 신랑은 늦어서 한밤중에 도착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주인은 오랜 후에 돌아왔다. “오랜 후에( 25:19)”라는 것은 종들의 예상보다 주인의 오심이 훨씬 지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이 두 비유는 재림을 상징하고, 신랑과 주인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오늘날도 주의 재림이 늦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 어리석은 처녀들이란 다름 아닌 신랑이 늦게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자기 확신에 빠져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넷째로 그들은언제 오실 지도 모르는 재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시간을 정해 놓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매 순간을깨어서 예비하고있는 삶이다( 24:42, 44). 무엇이 깨어 있는 삶인가? 날마다 종말론의 도표와 씨름하고 있는 생활인가? 아니면 처처에서 일어나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나 종교계에서 일어나는 충격적인 종말론적 소식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삶을 말하는 것인가? 성경은깨어서 예비하는삶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깨어 있는 삶이란 재림이 혹 지체되더라도 견딜 수 있는 넉넉한 기름을 준비하는 삶이며, 주인이 주신 달란트를 최선을 다하여 부지런히 일하는 삶이며, 지극히 작은 자에게도 마치 주님께 하듯 봉사하는 삶이다.

다섯째로 그들은 사건에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종말적 긴장의 삶을 살도록 가르쳐 주고 있다. 신약 성경은 세상 끝(sunteleia)이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9:26). 예수님께서도 종말에 대한 예언이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 4:21)”다고 하시고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 11:20)”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미 종말적 삶이다.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영광의 천국을 소망 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함께 내 삶속에 이미 도래한 은혜의 천국에서 종말을 맛보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종말적 삶이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들

그러므로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밀려올 수많은 시련을 눈앞에 두고 종말과 종말적 사건을 올바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성경 말씀을 연구하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 곧 오실 역사적 예수님의 재림은 계속 강조되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매순간 하루하루를 마지막 순간처럼 종말을 느끼고 사는 깨어 준비하는 일도 강조되어야 한다. ‘아직’(not yet)이미’(already)가 불균형을 이루면 종말은 극단으로 흐른다.

종말적 삶이란 구원을 확신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다. 종말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재림신학은사건 중심의 종말론에서생활 중심의 종말론으로 바뀌어야 한다.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느냐에서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바꾸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다리던 주의 재림이 오면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준비한 하늘에서( 14:1-4) 영원히 구원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때 세상의 짧은 순간을 선택하지 않고 영원을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쁨은 끝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