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는데, 다시 ‘구약의 율법’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대답] 답변을 들으시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신 “지존자”(삼상 15:29),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빛들의 아버지”(약 1:17)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상황이 변하는 것에 따라 어떤 때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 어떤 경우에는 저렇게 다른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특별히 사람들을 향한 그분의 뜻은 변함이 없고, 그분의 언약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즉,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율법을 주셨고, 시내산에서 영원한 도덕법을 주셨고, 갈릴리 한 산에서는 그 율법과 계명을 더 깊은 차원으로 강화하여 말씀하셨지만, 그 율법의 본질과 언약의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루터, 칼빈, 스펄전, 웨슬리, 무디, 캠벨 모건, 스트롱, 빌리 그래함 등 기독교 역사에서 빛나는 수많은 별과 같은 분들이 ‘십계명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므로 변함이 없고, 그분의 정부의 법이므로 십자가 이후에도 여전히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또한 성령께서는 지키도록 하신다.’라고 증언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니고 있는 교회가 십계명을 필요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가르친다면, 그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뜻에서 심각하게 벗어난 것입니다.
[질문2] 십계명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주어졌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랑의 계명이 주어진 것 아닌가요?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 십계명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십계명은 이미 폐해진 것 아닌가요?
[대답] 이 질문은 첫째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정도 차이가 있지만 구속사의 시대를 일곱 세대로 구분하여, ‘율법시대’와 ‘은혜시대’를 구분하면서, 모세와 예수님을 대척점에 놓는 것은 세대주의에 심각하게 오염된 관점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행복하고 존귀한 존재가 되도록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시내 산에서도, 갈릴리 한 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비극은 하나님의 법이 무시되거나 위반될 때 생깁니다. 미국의 한 대학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두 그룹 중, 시험 전 십계명을 읽게 하고 시험을 본 그룹은 현격하게 부정행위의 비율이 줄어들었습니다. 율법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와 행복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법’, 그리스도의 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법은 본질과 내용에 있어서 행위의 법과 동일합니다. … [그리고] 그 내용은 성경 전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으며, 또한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는] 복음적인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십계명의 율법이 [명령이기 때문에] 그 규정하는 바대로 순종으로 향하게 합니다.” 크래독, Divine Drops Distilled (1650), p. 144)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금지된 무슨 죄든 십계명에 있는 어떤 명령의 위반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백스터, Aphorismes of Justification (1743), p, 156.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의 교훈을 크게 하셨습니다(사 42:21). 십계명에 모든 행위의 법이 요약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신약성경의 모든 격려와 금지의 명령은 십계명의 확대입니다(마 22:40).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감으로 그 율법, 십계명의 권위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킬뱅,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1845), l:277.
[질문3] 그런데 바울이 율법은 폐해졌다고, 소용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대답] 사실상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도덕법인 십계명이 폐해졌다고 말하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폐해졌다는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첫째 구분 : 바울은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율법”이 있다고 말합니다(갈 3:19). 그 대표적인 것이 제사제도와 절기에 관한 율법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속죄의 희생이 되심으로 그 준수가 폐하여졌습니다. 준수의 의무가 폐해진 것은 예식법입니다. 도덕법인 십계명은 “그 율법은 헌신과 거룩한 생애와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영원한 규율입니다.” 칼뱅, 1845, 당연히 폐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잘 구분하셔야 합니다(딤후 2:15).
(2) 둘째 구분 : 율법은 죄를 규정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이중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벌적 속성, 언약적 속성. 범죄하면 율법이 죄책을 요구하고 그에 따른 형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롬 6:23a). 그 사망의 형벌을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하심으로 죄인인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형벌 율법 아래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은혜. 그분의 희생을 통해서 다시 아버지와 화목하게 되었으니 언약 회복, 그의 명령을 기쁘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언약적 속성은 그대로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이 계속하여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께서는 그가 은혜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그에게 주어진 언약의 은혜와 용서가 철회될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마 18:34~35; 22:12~13).
[질문4] 율법이 거룩하고 선하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롬 7:12). 하지만 바울은 율법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실제로 수행할 어떤 마음이나 능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대답] 예, 말씀하신 대로 율법 자체가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나 능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명령’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우리의 구원자께서 요청하시는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과 마음을 가질 때에 성령께서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율법의 기능을 ‘몽학선생’이라고 표현한 것은, 율법의 형벌 아래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보고 깨달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지, 율법이 무력하다거나 율법의 제한된 능력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에 대한 말씀을 면밀히 살펴 보면,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법을 기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히 10:16 참조)
[질문5]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지 않나요? 사랑하면서 살면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니,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대답]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법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의 법’입니다. 흔히 말하는 사랑이 얼마나 나약하고 주관적입니까?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명령에 대한 반응은 둘 중 하나입니다.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요한이 초기 교인들에게 무엇이라고 권면했습니까? 살기 힘드니, 핍박을 받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요한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5:4)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죄와 타협하지 않고, 불순종을 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세상 권세가 무서워서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율법과 관련하여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하나님 안에 산다고 말하는 자’는 반드시 ‘행위’가 동반되는 삶을 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하는 행위에 ‘모델’모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 그의 모델입니까?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그분이 사셨던 것과 똑같이!”요일 2:6. 원문성경 예수님이 신자의 행위 순종의 모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순히 정적이고 관념적인 만남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을 동반하는 거룩한 교제입니다.
요한일서 2:6 말씀의 <한글 개역 성경>에서 분명하게 번역되지 않는 구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옵헤일레이’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모본이 가리키는 ‘의무’에 따라 ‘해야 한다’ ASV, NASB, NRSV, NKJV, ought to. ‘반드시 해야만 한다’must라는 의미입니다. NIV 사랑의 사도는 신앙의 모델이신 “그가 행하시는 대로, 그분이 사셨던 것과 같이, 행해야 한다.”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며 주님이 보여주신 모본을 따라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요일 3:9)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겼습니다.’(요일 5:4) 그 순종이 승리하게 하였습니다.
“사랑하면서 살면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롬 13:10).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규범이 되어야 할 계명, 즉 사랑의 계명은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요일 2:7)이라고 말씀하셨고, 이 계명은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십계명입니다(막 12:33; 눅 10:27).” 카리스 종합주석 95:113.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지 않나요?” 이 생각은 누구의 생각입니까? 예수님의 생각입니까? 요한이나 바울의 생각입니까? “[반율법주의자들] 그들은, 마치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를 모든 개인적 의무들이나 스스로 행함으로부터 풀어놓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율법을 행할 책임이…은혜의 복음적 매개를 통해서이지만, 마치 우리가 행위 언약 아래 있는 것처럼, 지금도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반율법주의자들은 모든 의무를 행위의 문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러더포드, A Survey of the Spiritual Antichrist (1648), II:28, 29. 하나님의 뜻과 다른 생각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주님이 명령한 그 “사랑”은 유약하고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 없이, 거룩하게 행위하는 ‘단호한 사랑’입니다. 물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죄없는 생애를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모본을 따라 살고자 할 때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빌 4:13)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