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을 기뻐함에 대한 큰 장벽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문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은 질병과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하다. 먼 아프리카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식은 그래도 멀리 떨어져 있고 그들이 혈육관계도 아니니 심적 고통이 덜하다. 그러나 가까운 가족에게서, 때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나 부모에게 닥치는 불행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결코 쉽지 않은 의문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실까?’ 나는 기도의 놀라운 응답을 많이 경험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기도하는 자 앞에서 사정없이 문을 닫아버리고 문고리마저 걸어 잠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일도 인생살이에서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실까?
사람의 차원과 잣대에서 보면 하나님은 유죄(?)인 경우가 많다. 정말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실까?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깊이 기뻐할 수 없다.
2. 하나님은 항상 의롭고 사람은 불의하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은 의롭다고 말한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로마서 3:4).
성경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찬송하고 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하여 “사람에게 판단 받으시고 이기겠다”(롬 3:4)고 까지 말씀하신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끝없이 메아리치며 영감을 주는 위대한 사건이다. 모세의 지도를 따라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춤추고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넌 홍해 바다에는 수많은 애굽 군인들이 수장되어 있다. 그 앞에서 춤추고 노래한다.
누가 수장시켰는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그 애굽 군인들은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들이고 아버지였다. 그럼에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시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애굽기 15:1-3).
여러분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출애굽을 노래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홍해 바다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한 의심은 추호도 없다.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한다. 느헤미야는 출애굽 사건을 이렇게 기록한다.
“주께서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적과 기사를 베푸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니, 이는 그들이 우리의 조상들에게 교만하게 행함을 아셨음이라. 주께서 오늘과 같이 명예를 얻으셨나이다. 또 주께서 우리 조상들 앞에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사 그들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같이 통과하게 하시고 쫓아오는 자들을 돌을 큰 물에 던짐 같이 깊은 물에 던지시고”(느헤미야 9:9-11).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께서 애굽의 교만을 심판하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의롭고 애굽 사람들은 불의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시편 106:7-8).
무슨 뜻인가?
애굽 사람들도 불의하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의롭지 않았다. 모두가 죄의 저주 아래 있다. 저주 아래 있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애굽 군인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셨다. 성경 어디에도 홍해를 건널 때 일어난 사건에서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말하지 않고 의롭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은혜주실 자를 은혜주시고 심판할 자를 심판하신다. 사람은 불의해도 하나님은 의롭다.
많은 사람에게 애굽의 교만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은 것에 대한 분노와 슬픔은 없다. 죄의 손으로 하나님의 “뺨을 후려치고” 더러운 마음에서 올라오는 불경의 “침을 하나님의 얼굴에 뱉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마태복음 26:67).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고 멸시하는 것에 대하여 돌처럼 무감각하다. 하나님의 마음은 아프고도 아프다. 사람은 자신과 인간에게 닥친 불행만 보고 하나님을 판단한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리요”(로마서 3:5-6).
하나님의 주권의 저울추는 기울지 않고 공의롭다. 하나님의 은혜가 차별이 있으실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태복음 5:45).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에게 넘치는 인내를 보이셨다. 그분의 위대함을 보이셨다. 애굽에서 일어난 일들은 사막을 건너 가나안에까지 퍼졌고 라합은 소문만으로도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은혜는 차별이 없다. 애굽 사람들은 “핑계할 수 없다”(로마서 2:1).
그러나 언제까지 은혜가 베풀어질지, 언제 심판을 내릴지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주권에 속한 일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전혀 의심이 없다. 하나님만이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높이면서도, 비난받지 않으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인간이 생각할 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죄처럼 느껴져도 하나님만이 죄를 짓지 않고 심판을 공의롭게 행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3. 요셉의 삶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
‘섭리’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개념은 분명히 있다. ‘섭리’란 ‘공급하다’(provide)라는 단어에서 만들어졌다. 섭리는 하나님이 “목적에 맞게 공급하는 행위, 또는 세계를 지탱하고 다스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악을 도모하나 하나님은 선을 도모하시는 분이시다. 요셉의 생애만큼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기록은 없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아서 구부러진 나무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놔두었다면 그는 인생을 망쳤을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콩 심은 데에서 팥이 나겠는가?
형들에게도 안하무인이었던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미디안의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리게 된다. 노예의 삶은 짐승보다 못한 삶이고 죽음보다 못한 삶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왜 하나님은 형들이 요셉을 종으로 팔았을 때 막지 않으셨을까? 막으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 막지 않으신 것은 불의가 아닐까?
사람이 막아야 할 죄악을 막지 않았다면 불의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불의가 아니다.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요셉의 형들이 악을 도모했을 때 하나님은 선을 도모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요셉은 그의 죄의 열매를 거두고 있었고 형들은 동생을 짐승보다 못한 죽음의 발톱 앞에 돈 몇 푼으로 넘겨주는 악을 뿌렸다. 모두가 죄의 저주 아래에서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을 계획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형들을 막지 않으셨지만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고, 요셉의 형들은 불의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요셉은 종으로 끌려가는 그 날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는 좋은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야곱은 요셉에게 자기의 평생을 인도하신 하나님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요셉은 야곱의 이야기를 마음에 잘 새겼다. 하루아침에 아들에서 종의 신세가 되어 칠흑 같은 미래로 끌려가던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을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결심했다.
“요셉은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여호와께 자기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고 이스라엘의 수호자 하나님께서 그가 유랑하는 땅에서도 그와 함께 계시기를 기도하였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하늘 왕의 신민답게 행동하여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리라는 고결한 결심으로 그의 영혼은 감동되었다. 그는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운명의 시련을 인내로 당하며 날마다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하였다. 이 하루의 경험이 요셉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무서운 재난이 그를 응석 부리는 아이에서 사려 깊고 용감하고 자제력 있는 어른으로 변화시켰다”(부조와 선지자, 213).
하나님은 형들의 악을 막지 않으셨지만 죄가 없으시다. 요셉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무서운 재난이 그를 변화시켰다.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시다. 형들은 아버지에게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야곱의 통곡소리가 들리는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하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왜 생기지 않겠는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무심하게 보이는데 말이다. 야곱은 요셉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꿈에도 알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위대한 선을 도모하고 계심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인간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영적인 맹인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읽어보라. 요셉의 기록에서 반복되는 문구가 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그 주인이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세기 39:2, 3, 21, 23).
하나님은 야곱을 통하여 요셉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하나님은 요셉이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결심한 요셉과 늘 함께 하셨다. 요셉의 삶에는 정지 신호와 우회로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주인집의 가정총무로 잘 나가던 요셉은 여주인의 유혹을 거절한 일로 지하 감옥에 갇힌다. 감옥에서 잘 나가던 요셉은 꿈을 해몽해준 신하에게 배신을 당한다. 잘 나가나 싶으면 정지 신호가 앞을 가로막는다. 고속도로를 탈만하면 우회로가 나온다.
요셉도 어찌 힘들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늘 그와 함께 계셨다. 마침내 요셉은 오랜 인내의 세월 후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기근으로 멸망할 뻔했던 애굽을 구원했다. 그뿐인가?
기근으로 가나안에서 굶어죽을 뻔한 야곱과 모든 형들, 그리고 가족을 살리게 된다. 애굽에 양식을 사러 왔다가 총리대신이 된 요셉을 만나게 되어 혼비백산한 형들에게 요셉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세기 45:4-5, 7-8).
사람은 악을 도모하나 하나님은 선을 도모하신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도모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를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항상 선을 도모하시는 분이시다. 사람은 불의하나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시다. 요셉의 형들도 세월의 고난에 익어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고난의 좋은 역할은 분명히 있다. 고난의 본질을 하나님이 어찌 모르시겠는가?
4. 왜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실까?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이유는 사람은 죄의 쾌락에서는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지만 고난의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에서는 벗어나려고 한다.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다.
사람은 스스로의 죄악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때로는 전염병 때문에,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일 때문에 고난에 빠진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의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럴 때 항상 명심하라.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시다. 그것을 깊이 믿으라. 그것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 창세 전에 죽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은 고난이 구원과 인생살이에서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고난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작동하여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실 수 있음을 믿으라.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의 은혜로 모든 인생의 고통이 끝날 것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이룰 것임을 굳게 믿으라.
“저(하나님)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예레미야 애가 3:32-33).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6).
창세 전에 죽임 당한 어린 양을 바라보라. 먼저 고난당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라. 하나님은 창세 전에 선한 일을 이미 시작하셨다. 그리고 선하게 마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시다. 그 진리 안에서 우리가 쉼을 얻고 안도를 얻을 수 있다. 시련의 왕 욥도 마침내 고백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일이 없는 줄 아오며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2-3, 6).
야고보는 욥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야고보서 5:11).
욥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는가?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더라”(욥기 42:12-13, 15-16).
하나님께 운명을 온전히 맡기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으므로”(전도서 3:11)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인생은 쉽지 않다. 때로는 가슴이 찢기고 사는 것이 죽음보다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 마음에 웅변으로 외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잊지 말라.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시다. 수많은 고난을 경험했던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바울은 말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마음에 깊이 받아들이면 그 근원에서 기쁨이 솟아난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영혼이 쉼을 얻게 된다. 하나님과 천사들의 위로의 찬양이 마음을 채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