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은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이거나 무식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19세기에 태어난 심리학은 명실공히 과학의 반열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기독교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심리학은 목회 사역의 필수적이고 효과적인 도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심리학이기에,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심리학은 위험하다고 말씀드리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는 더욱 위험합니다. 심리학의 기초와 바탕이 무신론과 인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기초가 무신론적이기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성경과 조화될 수 없고, 바탕이 인본주의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심리학입니다. 심리학이 위험한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과학이 아닌 심리학
현대 사회에서 심리학은 사회과학 영역에 속한 학문으로 인정받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신뢰해도 좋은, 진정한 의미의 과학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과학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심리학이 과학의 옷을 입었고, 그래서 누구나 참된 과학으로 신뢰할 가능성이 있기에, 심리학은 위험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는 더욱 위험합니다.
심리학이 과학이기에 사역의 도구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면 진화론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학 교과서에 수록된 진화론도 과학으로 인정하고 사역의 도구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그런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창조적 진화론 혹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성경과 진화를 절충 혹은 통합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바른 믿음이요 옳은 신앙일 수 있을까요?
심리학이 과학이 아닌 결정적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다른 사람이 알아내거나 규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순간마다 바뀌고, 자기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것이기에, 어떤 관찰과 분석으로도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이것이 심리학은 처음부터 과학이 아닐 뿐 아니라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진정한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관찰과 실험이 불가능한 진화론이 과학이 아닐 뿐 아니라 될 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심리학이 과학이라는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소위 ‘객관적 데이터’입니다. 심리학의 모든 이론과 주장이 데이터에 근거하지만, 심리학의 데이터는 객관적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 자체가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의 데이터는 진위(眞僞)를 가려낼 수 없는, 응답자들의 ‘주관적’ 반응과 고백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런 주관적 데이터에 대한 해석 또한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데이터에 대한 분석이 심리학자마다 다른 이유입니다. 게다가 프로이트의 이론을 따르는지, 융의 이론을 따르는지, 스키너나 아들러의 이론을 따르는지에 따라서 분석 결과가 다릅니다. 일관되고 검증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은 과학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심리학의 현실을 기독교 상담 심리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게리 콜린즈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과학을 엄격하고 경험적이며 실험적인 방법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지는 학문이라고 볼 때, 전반적인 심리학은 과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이와 반대로, 과학을 실험실 밖에서 수집되는 데이터, 인간의 모습들에서 수집되는 데이터, 그리고 신의 계시로 인한 데이터까지 포함한 모든 데이터에 대한 주의 깊고 체계적인 관찰과 분석을 한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심리학도 과학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Gary R. Collins, Can You Trust Psychology?, 141)
이것이 오늘날 과학이 된 심리학의 실체입니다. “엄격하고 경험적이며 실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고, 실험실 밖의 온갖 이론과 데이터에 근거해야 과학이 될 수 있는 학문입니다. 이처럼 ‘주관적’ 연구 결과를 근거로 마음과 정신을 분석하고, 행동을 해석하고, 상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학문이 심리학입니다. 신뢰해도 될까요? 저는 이런 심리학에 기초한 [MBTI 성격 유형 검사]나 [그림 심리 검사]가 복음 사업의 유용한 도구인 것처럼 사용되는 것을 염려합니다.
과학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심리학의 위험성은 크게 낮아질 수 있습니다. 문학이나 예술처럼 각자의 취향과 선택에 따라 사용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아닌 심리학은 문학이나 예술만큼만 위험합니다. 하지만 과학이면 전혀 다릅니다. 과학은 그것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 선택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정하면 과학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고, 거절하면 과학을 부정하는 사람이 되는 엄중한 선택입니다. 이것이 과학의 힘이요 권력입니다. 세상 모든 학문이 과학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명실상부한 과학이 된 심리학은 자기의 주장을 수용하라고 강요합니다. 사람의 현재를 지배하는 것은 ‘무의식’에 숨겨진 ‘과거’이며, 문제의 원인은 ‘죄’가 아니라 ‘상처’이고, ‘자존감’을 높이고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완성이라는 주장을 ‘과학’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신뢰하는 한 저자의 글로 이 주제를 매듭짓겠습니다.
“오늘날 회의주의와 불신의 사상이 과학이라는 의상을 걸치고 나타나는 때에 우리는 백방으로 경계하여야 한다. 대적 마귀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 수많은 인간을 속이고 있으며 자기의 뜻을 따르게 하는 포로들이 되게 한다. 소위 과학이라고 일컫는 분야에서도 인간의 정신에 관련된 과학을 이용하여 사탄이 노리는 결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사탄은 뱀처럼 살그머니 기어들어와 하나님의 사업을 타락하게 한다.”(2SM, 351)
2. 성경과 조화될 수 없는 심리학
그리스도인에게는 심리학이 과학의 옷을 입은 것보다 더 위험한 이유가 있습니다. 심리학은 성경과 조화될 수 없는 학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심리학을 경계하고 주의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심리학이 성경과 조화되지 않는 것이 왜 문제일까요? 다른 학문에는 그런 요구나 기대를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성경과 조화되는 국어나 영어, 성경과 조화되지 않는 화학이나 물리, 이런 말은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모든 학문은 그것이 올바르다면 성경과 조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세속 학문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성경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큰 위험요인이 아닙니다. 아무도 국어책에 단군신화가 실렸다고 염려하지 않고, 그것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리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성경적이기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과 조화되는지 살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경계해야 하는 학문이 있습니다. [생물]과 [지구과학]입니다. 왜일까요? 가짜 과학인 진화론이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조화될 수 없는 요소가 들어있기에, 그리스도인은 이 두 과목을 가르치고 배울 때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심리학은 성경과 조화되지 않고 성경으로 입증할 수 없기에 위험한 학문입니다. 그 까닭은 많은 기독교 심리학자들이 심리학과 성경이 조화된다고, 조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후로 심리학과 성경 사이에는 영원히 건널 수 없을 것 같던 넓고 깊은 강이 흘렀습니다. 심리학이 무신론이라는 기초와 인본주의라는 바탕 위에 세워진 비성경적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 융, 아들러, 로저스, 스키너 등 심리학의 토대를 구축한 학자 중에 성경에 그 기초를 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힘이 생겨난 심리학을 성경과 조화시켜 복음 사업의 도구로 사용하자는 학자들이 생겼습니다. 이들을 ‘절충주의자’ 또는 ‘통합주의자’라고 하는데, 앞에서 언급한 게리 콜린즈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심리학은 세상이 입혀준 ‘과학적’이라는 옷에 기독교인들이 입혀준 ‘성경적’이라는 옷까지 입게 되었습니다. 두 배의 힘을 확보했고 그만큼 신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리학은 성경과 조화되지도 않고 조화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심리학과 성경의 절충 혹은 통합을 외쳐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하나가 될 수 없듯이, 심리학과 성경은 조화될 수 없습니다. 무신론과 인본주의에서 시작된 심리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원천(源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심리학과 성경이 조화된다고 믿습니다. 절충주의 심리학자들이 가르치고 상담할 때 성경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으로 배우는 심리학], [성경적 심리학의 체계], [성경 속의 심리학]과 같은 제목의 책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성경 왜곡입니다. 더하거나, 빼거나, 구부리거나,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하지 않고서는 성경을 심리학 이론에 집어넣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이 성경을 왜곡하는 경우는 셀 수도 없지만,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말씀입니다. 심리학 최고의 목표가 자존감을 높이고 자아 성취를 이루는 것인데,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그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에 너 자신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고 해석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자기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니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 본성에 이보다 더 달콤한 속삭임이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해석은 명백한 성경 왜곡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걱정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듯 이웃도 사랑하라 하신 말씀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입고, 위험하면 피하는 것으로 자기를 보호하듯 이웃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심리학이 자기 사랑의 근거로 왜곡한 것입니다. 이렇게 왜곡된 말씀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을까요?
인간은 자기 사랑이 넘쳐서 문제이지 모자라서 불행한 존재가 아닙니다. 본능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마 16:24) 해야 하고 “자기를 낮추는”(마 23:12) 자가 되어야 하며 “자기 목숨까지 미워”(눅 14:26)해야 합니다. 누구나 자기 사랑의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자기 사랑으로 자존감을 높이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런 왜곡은 성경을 부정하는 것보다 심각하고 위험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왜곡하는 심리학을 그리스도인이 신뢰해도 되겠습니까?
하나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정신의학과 교수이자 기독교 심리학자인 민 모 교수가 2021년 4월 1일 [크리스천투데이]에 기고한 “성경과 정신분석 이론”이라는 기사의 일부입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 성적 본능과 공격성과 쾌락, 투사, 대치, 억압, 등등 인간 마음의 정신역동 이론이 여기저기에 암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공통적인 예는 수없이 많다.”
이렇게 주장한 민 교수는 성경과 정신분석의 공통점의 증거를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무의식’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굳이 마음으로 부인하고 거부하는 것’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은 ‘의식적 자아’는 원하지만, 나도 모르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신도 미처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이 네 원수니라’는 말씀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어릴 때의 가족과의 경험이 이후 어른이 되었을 때 갈등과 노이로제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은 정신분석적으로도 옳다. 본능적 욕망을 자아가 통제하지 못하면 계속 갈등하게 되고 우울증이 오거나 스트레스로 당뇨병이나 고협압이 생길 수 있으며, 그 결과 자살이든 병사로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씀은 정신분석적으로는 내면의 감추어진 마음, 억압된 욕망, 잊혀진 과거 등을 알게 되면 노이로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기사를 읽으면 프로이트가 성경에 근거해서 심리학의 개념을 고안하고 발전시킨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나아가 정신분석이 성경에 기초한 성경적 치료법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어떤 사람입니까?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영적 세계를 철저히 부정한 사람입니다. 종교란 특허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유치한 것이며 인류의 집단 신경증이라고 혐오한 인물입니다. 이런 프로이트의 이론과 개념을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시킨 결과가 이 기사입니다. 이것이 심리학과 성경을 절충 내지 통합시키려는 시도의 실체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로 이 주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4-18)
3. 자기 숭배로 이끄는 심리학
2021년 11월 19일 자 국민일보에 “지금 세상에서 가장 빨리 퍼지는 종교는 자기 숭배”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자기 숭배(Self-Worship)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테디어스 윌리엄스 미국 바이올라대 조직신학 교수는 최근 미국 복음주의 단체인 TGC에 칼럼을 기고하고 자기 숭배 현상의 위험성을 진단했다. 자기 숭배란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행동을 말한다. … 윌리엄스 교수는 십계명을 대체할 ‘육 계명’도 등장했다고 꼬집었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계명은 ‘당신의 마음은 진리의 근원이자 기준이다’, ‘당신의 감정은 권위 있다’, ‘당신은 주권자다’, ‘당신은 위대하다’, ‘당신은 최고선이다’, ‘당신은 창조주다’ 등 여섯 가지다. … 그는 자기 숭배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우리가 진리의 근원이 되려 하면 서서히 미치게 될 것이고 스스로 만족의 근원을 찾으려 할 때는 비참한 난파선이 되고 만다고 경고했다.”
윌리엄스 교수의 지적처럼 자기 숭배는 종교,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빨리 퍼지는 강력하고 매력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숭배라는 종교의 열렬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숭배는 자기 사랑의 열매이고 종착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숭배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기 사랑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현대인의 애틋하고 극진한 자기 사랑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현상이 있습니다.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나에게 주는 선물로 명품을 사고, 나에게 주는 선물로 고급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고, 나에게 주는 선물로 빚을 내서라도 휴가를 떠납니다. 왜 이럴까요? 내가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기 사랑이 자기 숭배로 자라나는 것은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만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 아닐까요?
심리학에서는 우리 시대의 이처럼 지극하고 애틋한 자기 사랑을 ‘자아 존중감’, 줄여서 ‘자존감(自尊感:self-esteem)’으로 표현합니다. 자존감은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느낌으로 높을수록 행복하고 낮을수록 불행하다고 주장합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매사에 긍정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열심히 노력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존감은 자기 사랑과 다르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은 것인데 자기 사랑이라고 하면 이기적이고 천박하게 보이지만, 자존감이라 표현하면 고상하고 품격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입니다.
자존감은 197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자존감 운동(self-esteem movement)의 영향으로 인간 행복의 필수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이 개인과 사회에 만연한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낮은 자존감’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자존감 운동의 주역이었던 심리학자 나다니엘 브랜든에 의하면 불안, 우울증, 친밀감, 성공에 대한 두려움, 배우자 구타, 자녀 성추행 등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문제의 원인은 낮은 자존감입니다. 이 주장을 지지한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 존 바스콘셀루스는 1986년에 [자존감과 개인 및 사회적 책임에 관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불과 몇 십 년 만에 ‘높은 자존감’은 개인과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자존감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받아야 하고, 인정받아야 하고,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을 듣거나, 필요가 채워지지 않거나, 요구가 거절되면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한 마디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자존감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존감을 지켜주고 높여줄 수 있는 사람은 부모를 포함해서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격려하고, 자기를 용서하고 자기를 사랑함으로 자존감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 세상이 자존감, 즉 자기 사랑에 푹 빠진 이유입니다. 서점에 가 보세요. 자기 사랑을 외치고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 하루가 멀게 출간됩니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자기 사랑’이 주제인 책은 91권, ‘자존감’이 주제인 책은 509권이 검색됩니다. [자기 사랑의 심리학], [나를 행복하게 하는 자기 사랑의 기술], [우리 아이를 위한 자존감 수업], [높은 자존감의 사랑법]과 같은 책입니다.
다음은 [자기 사랑의 심리학]에 기록된 자기 사랑을 키우는 11가지 방법입니다.
1. 자신에게 ‘난 네가 좋아’라고 하루에 열 번씩 말하기
2. 자신에게 ‘난 너의 ~한 점을 용서해’라고 하루에 열 번씩 말하기
3. 자신에게 연애편지 쓰기
4.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기록하거나 녹음하여 매일 듣기
5. 자신의 긍정적인 면을 보기 위해 누구에게서나 긍정적인 면 발견하기
6. 자신이 조금만 나아져도 많이 칭찬해주기
7. 다른 사람의 칭찬을 흔쾌히 받아들이기
8. 남과 자신이 인정해주는 칭찬을 적는 수첩 만들어서 기록하기
9. 자신이 마음 편하게 살 권리를 인정해 주기
10. 자신의 장점과 강점을 작성하고 수시로 보충하면서 읽기
11. 내 안의 씨앗이 꽃피울 수 있도록 ‘나는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지기
자기 사랑을 부추기는 심리학, 놀랍고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기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용서하고, 편지 쓰고, 칭찬하느라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이렇게 자기에게 빠져서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히 12:2)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눅 9:23)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이렇게 자기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이 자기 숭배라는 종교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여기에서 바울은 말세(末世) 사람들의 특징으로 무려 열아홉 가지를 나열하는데, 첫 번째가 “자기를 사랑하며”입니다. 자기 사랑은 말세 사람들의 첫 번째 특징일 뿐만 아니라 뒤따르는 열여덟 가지 특징의 원인입니다.
왜 돈을 사랑할까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왜 자랑하고 교만하고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할까요? 자기를 가장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언급한 모든 악행과 범죄의 뿌리는 자기 사랑입니다. 심리학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자기 사랑’을 바울은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왜 바울이 이 편지를 디모데에게 보냈을까요?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같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말세에 살면서 그 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자기 사랑, 즉 자존감을 높이려고 혈안인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